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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1930 -1945 저항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드디어 일제강점기 마지막 글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끝내면, 2~3개의 글로 한국사가 완전히 끝날 겁니다. 정말 끝이 보이네요.

 

 

이미 10, 20년대의 저항을 통해 너무나도 많고, 너무나도 감사한 분들을 배웠습니다.

 

그분들이 모든 것을 던지며 만들고자 했던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살고 계신 겁니다. 선물이랄까요?

 

물론 현재의 상황, 현재의 모습 등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분들도 있겟죠.

 

하지만 지금의 이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더 안 좋은 상황에서 노력했던 분들을 모습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 뒤의 사람들 또한 우리를 보면서 우리 시대의 과제를 위해서 행한 노력들을 얘기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이야기하겠죠. 우리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고요.

 

저는 이런 것들이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역사의식들이 계속해져 이어져 나가야겠죠?

 

 

나의 뒤에 오는 사람들 한 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식민지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꿈.

 

그 꿈 하나를 위해 청춘과 재산을 바친 이야기, 3부를 시작하겠습니다.

 

 

 

 

1. 1930년대의 저항

 

30년대 이후의 저항을 설명하기 위해, 편의상 라인을 잡아보겠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활동을 나눈건데, 물론 30년대의 설명 속에 간간히 40년대 얘기도 등장할겁니다.

 

하나 더, 30년대를 세 덩어리로 나눌 겁니다. 번거롭게 왜그러냐! 한번에 해라! 하실 수도 있지만, 이 편이 확실히 수월합니다.

 

 

앞의 항일무장투쟁 흐름이 기억나시나요?

 

독립군들이 대장정 끝에 만주지역에 들어와 3부를 만들었죠.

 

미쓰야 협정 이후 3부를 북만주 - 혁신의회 / 남만주 - 국민부로 줄였고요.

 

그런데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다시 어려워집니다.

 

이에 많은 독립군이 이동하죠. 만리장성 이남, 중국 관내 지역이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무대가 될겁니다.

 

 

즉 중국에서의 활동은 1930년대 초기와 중반 이후의 활동으로 구분 지어볼 수 있겠죠.

 

나머지 한 덩이는 국내에서의 항일무장투쟁입니다.

 

사실 국내의 항일무장투쟁은 앞의 저항글, 일제강점기 글에서 대부분 보셨을거에요. 복습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0년대는 이 세 덩어리로 정리하고, 40년대 활동으로 글을 마무리 지어보겠습니다.

 

그럼 만주/관내/국내 세 덩어리를 하나씩 들여다봅시다.

 

 

 

1-1) 만주

 

 

1920년대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형태는 만주지역을 기점으로 달라집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1931년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중국인들은 이때 알아챈거죠.

 

'아! 우리들의 적은 일본이구나, 일본과 맞서 싸우고 있는 한국에게 우호적 모습을 보여야겠구나!'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

 

 

 

그러면서 30년대부터 나오는 모습이 한중 연합 작전이라는 겁니다.

 

192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미쓰야 협정이라 해서 중국인들이 한국인 잡아 넘기고 했잖아요?

 

그 정도로 중국과 상황이 안 좋았는데, 31년 만주사변 이후로 한중연합작전들이 전개되는 점이 이전과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30년대 초, 만주지역 봅시다. 북만주의 혁신의회, 남만주의 국민부가 여전히 활동 중입니다.

 

 

북만주지역 혁신의회 계열은 이름을 한국독립당으로 바꾸고, 남만주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국독립당이 가지고 있었던 부대를 한국독립군이라고 합니다. 조선혁명당은 뭘까요? 조선혁명군입니다. 간단하죠?

 

 

한국독립군을 이끌던 사람은 지청천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중에 만들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작전에 의해서 승리를 거둔 전투는 쌍성보전투, 대전자령 전투입니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영릉가 전투, 상징성 전투에서 이기면서 두 세력이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는 모습입니다.

 

여기까지가 1930년대 초반의 활동인데, 만주사변 이후로 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 난이도가 굉장히 올라갑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죠. 

 

중국 관내 파트로 넘어가기전에, 만주사변 이후에도 만주지역에 남아 활동한 내용 몇 가지만 보고 갑시다.

 

 

대부분이 떠남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는 부대, 동북항일연군이 있습니다.

 

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들이 중심으로 조국 광복회를 만들기도 하죠. 

 

또 조국 광복회의 후원 속에 국내의 보천보 전투가 승리하기도 합니다. 

 

남한의 교육과정에선 그리 심도있게 보는 부분은 아니지만, 북한에선 아주 유명합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연관되어 있거든요. 

 

비록 보천보 전투는 국내의 전투지만,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의 연관이 있음을 기억해두세요.

 

 

 

20년대의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이어서 30년대에도 이렇게 자랑스럽게 싸우고 있습니다. 만주 한중 연합 작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1-2) 중국 관내 

 

 

만주사변으로 이동해온 독립군은 관내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중국 관내에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조직이 있어요. 바로 1919 3.1운동의 결과 출범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니다.

 

중국 관내를 상하이라고 말하면 와닿으실까요? 

 

1930년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려움들을 딧고 성장하고 있는 과정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흐름을 다시 한번 복습해볼까요?

 

김구가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20년대에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회의가 뭐다? 1923 국민대표 회의

 

여기서 창조파(신채호)와 개조파(안창호)가 대립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더욱더 위축되어 갔다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대로 쭉 가다가 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살아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어서 만든 조직이 바로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이 대표적인 인물이죠. 이봉창은 일본에서 천왕을 향해, 윤봉길은 중국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특히 윤봉길 의거가 성공하면서 중국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게 됩니다.  그러나 상하이 또한 일본의 압박을 받고,

 

결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대를 마무리하고 대장정의 길을 걸어서 최종 종착지, 충칭으로 갔죠.

 

그게 1940년이었습니다. 8년 동안 6000KM의 대장정이었죠.

 

 

그런 여정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5년에 만든 조직, 한국국민당이 있습니다. 

 

근데 사실, 이 당시 35년도에 굉장히 큰 이슈가 있었어요. 바로 중국 관내에 있었던 모든 세력들이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계열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당을 만든 게 한국국민당입니다.

 

시험에 나올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여러 세력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 세력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 충칭으로 온 40년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당이 한국독립당이죠. 앞의 글에서는 간단하게 40년, 충칭에서 여당(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고 했었죠?

 

뭔가 부족한 감이 있어 과정이라는 살을 붙여드렸습니다.

 

 

 

그럼 여러분, 여기서 하나 헷갈리실 게 있을 텐데 앞에서도 한국독립당이 나왔죠? 안 들어본 거 같다고요? 

 

.. 방금 바로 앞 만주 지역에서 했잖아요.

 

혁신의회에서 이어진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40년에 만든 한국독립당은 다른 겁니다.

 

 

 

이름이 같아서 헷갈린다고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당시에 어떤 단체 이름을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옵션이 그리 많지가 않아요. 일단 한국 아니면 조선. 둘 중 하나 쓸 것이고

 

독립 아니면 뭐 혁명정도.. 쓸 키워드가 별로 없죠? 불가피한 일입니다.

 

1930년대 초반에 있었던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에서 만들어진 한국독립당은 별개의 조직임을 기억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40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부대라고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진다 했습니다.

 

한국독립군을 이끌던 지청천이 총사령관 자리에 앉죠.

 

이 한국광복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글에서 설명을 드렸어요.

 

인도 미얀마 전선(43영국VS일본)에도 투입되었고, OSS 미군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45)도 전개했었죠.

 

 

 

한국광복군에 나중에 장준하가 합류하는데 이분은 나중에 유신, 박정희 정부체제에 저항했던 여당 인사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현대사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는 한 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는 점.

 

현대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에 맞서 싸우겠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라인이 이렇습니다.  이거는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흐름을 이미 한 번 쭉 보셨어서 이해가 어렵진 않을겁니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에 임시정부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 있다고 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0년에 충칭에 오면서 힘이 강해지는 것이고, 30년대 자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력이 아니었습니다.

 

 

 

20년대의 항일무장투쟁 단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판단합니다. '개별적 투쟁 (폭탄투척)으로는 한계가 있겠구나'

 

군대를 만들고 나아가 당을 만들기 위해, 조직화된 모습을 위해 의열단원들을 황푸군관학교에 대거 입교시키죠.

 

여기까진 설명해드린 부분이고, 이 의열단원들이 아예 조선 혁명 간부학교를 만듭니다.

 

학교도 만들고 이젠 1935년, 민족혁명당을 만들죠. 이게 1935년입니다. 한국국민당과 같은 시기죠?

 

 

당시의 한국을 대표하는 단체라면 이 의열단에서 이어진 민족혁명당이었습니다.

 

김원봉 라인으로 아주 많은 세력들이 모이게 되는데, 세력의 재편이 너무 김원봉 중심으로 되는겁니다.

 

그러다보니 또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죠. 이 민족혁명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백범 김구 라인으로 가는겁니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 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이 만들어진거죠.

 

 

아무튼 이 민족혁명당은 1935년에 조직된 이후로 세력들을 모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구축합니다. 1937년이죠.

 

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산하부대가 바로 1938년에 만들어진 조선의용대입니다. 

 

이 조선의용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부대라는 것.

 

별로 대단한 느낌이 안드시나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갑자기 경상도에 일본군대가 편성됩니다. 말도 안되죠?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일이 한중 연합 작전이라는 그 시대의 정신에 만들어진겁니다.

 

한국과 중국은 공동의 적 일본을 향해 싸워야한다는 목표 아래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겁니다.

 

 

또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의열단원들을 보내기도 했잖아요? 

 

당시 중국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의 교장도 할 정도로 제법 끈끈한 사이였습니다.

 

그런 인연들 속에서 상호 간의 신뢰가 구축되었기 때문에 조선의용군이 1938년, 중국 관내에 나타난거죠

 

 

 

 

 

자, 이제 이렇게 두 라인이 구축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1942년, 아주 역사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죠.

 

이러면서 한국광복군은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을 갖게 됩니다.

 

30년대 2개의 축이 하나로 합쳐진 역사적 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임시정부에 합류했으면, 나머지 일부는 어디로 갔을까요?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조금 강했습니다.

 

물론 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김원봉의 합류를 받아들인건 맞지만, 여전히 그랬죠.

 

 

 

당시에는 민족주의 정부가 아닌, 사회정부를 지향하는 세력 또한 많았습니다.

 

조선의용대 안에서도 김원봉을 따라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떠난 케이스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중국 정부, 장제스가 아닌 마오쩌둥 정부. 지금의 공산당이죠? 그쪽과 합류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조선의용대가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호가장 전투도 있었죠. 이게 1941년입니다.

 

최종적으로 이동 끝에 만들어진 부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입니다.  이름부터 그렇죠? 의용대 - 의용군

 

 

 

정리하자면 김원봉과 일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 일부는 사회주의 쪽에 합류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는 모습.

 

여기까지 중국 관내에서 벌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중국 관내에서도 활발한 한중 연합작전의 모습으로서 전투와 전쟁을 계속 이어가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

 

 

 

 

 

 

1-3) 국내

 

 

30년대의 마지막 덩어리, 국내 상황을 봅시다.

 

우리 잘 알고 있죠? 30년대 국내 일제강점기 정책이 뭡니까. 민족 말살 통치시기죠.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국내에서는 민족말살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특히나 국어, 역사쪽에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10, 20년대에도 글 한켠을 차지했던 녀석들인데, 30년대 이후가 진짜입니다.

 

 

우선 1920년대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했던 문맹퇴치운동, 1930년대에도 여전히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다른데, 바로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글자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을 보고 농촌 같은 곳으로 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글을 깨우쳐줄 수 있다. 이게 핵심이죠.

 

이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언론사가 동아일보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반까지만 활동하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대해 물어볼게요. 한글날을 제정했던 조선어연구회 기억나시나요?

 

가갸날을 제정하고 <한글>이라는 잡지도 간행했었죠. 30년대가 되면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최현배, 이극로 등이 활동했던 조선어학회는 활동이 되게 많습니다.

 

 

 

먼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라던지, 표준어 제정이라던지 국어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했고요.

 

그리고 20년대에 간행했던 <한글> 잡지를 학회로 와서도 여전히 간행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조선어학회에서 하려고 했던 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는 건데, 어떻게 됐다? 실패했다.

 

이 시도는 40년대 라인을 넘어서 까지 지속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면서 결국엔 실패한다고 설명드렸었습니다.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하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모습은 용인하지 않겠죠.

 

실패한 우리말 큰 사전 편찬은 결국 광복 이후에 편찬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국어 쪽에서 기억해야 할 시인들이 있습니다. 몇몇 분 떠오르시죠?

 

안타깝게도 시인에는 저항시인도 있고, 친일시인도 있습니다.

 

저항시인하면 너무나 유명한  윤동주. 1910년대 국외 저항 과정에 설립된 북간도 지역의 명동학교 출신이었죠.

 

북간도의 명동학교를 나온 윤동주 시인은 태어난 곳도 북간도 지역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

 

 

그래서 별 헤는 밤을 보면 고향을 떠나 밤하늘에 있는 별들을 보며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죠.

 

한국사 학습의 취지와는 조금 어긋나지만, 윤동주 시를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단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 나의 글, 나의 문자를 마음껏 쓸 수 없는 시기, 일본 말과 일본 글로, 일본 이름으로 시를 쓰던 자기 자신의 모습..

 

일제강점기 속 자신 내면의 부끄러움을 고발하는 시를 굉장히 많이 썻죠.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그 시대의 벽 앞에서 얼마나 괴로웠는가를 윤동주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40년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습니다. 민족 말살 통치기여서  창 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갈 수 가 없었죠.

 

그래서 윤동주도 창씨 개명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히라노마 도주.

 

그의 시를 보면 무덤가에 자기의 이름을 써본 이후에 지우는 모습이 나옵니다.

 

윤동주라는 이름을 쓰고, 이 윤동주라는 이름을 쓸 수 없는 아픔에, 부끄러움에 덮어버리는 모습이 나오죠.

 

 

 

이렇듯 윤동주의 시를 천천히 읽다 보면,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시대, 일제강점기로 돌아가야만 윤동주의 시를 완벽히 가슴으로 읽을 수 있죠.

 

윤동주가 있다면 또 다른 저항시인, 굉장히 느낌이 다른 분이 있습니다.

 

윤동주가 감성적인 시의 모습이었다면, 이 시인은 굉장히 굵직한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죠.

 

 

 

바로 이육사입니다. 이육사는 264번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감옥번호를 필명으로 삼은 거죠.

 

이육사 시인

 

이육사의 절정, 꽃 등등.. 유명한 시가 너무나 많습니다. 감옥을 17번이나 들어가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죠.

 

이렇게 자랑스러운 저항시인들이 있다면, 친일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훨씬 많았죠. 대표적으로 보겠습니다.

 

 

 

서정주, 그는 우리나라 민족 문학의 대가로서 국어 쪽에선 고평가 되는 인물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가 친일파임을 부정할 수 없죠.

 

친일시를 너무나도 많이 남겼던 인물이거든요.

 

청년들을 전쟁터에 몰아넣기 위해 자신의 붓으로 일제를 위해 글을 썼던 흔적이 너무나도 명백히 남아있는 반민족행위자입니다.

 

 

이렇게 국어 쪽에서 많은 활동이 있었다면, 역사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9년부터 쭉 이어진 민족주의 사학은 신채호 박은식의 계보를 이어가는 학문인데 이름부터 민족을 중시하는 학문이죠?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정인보. 얼을 강조하고 조선학 운동을 상당히 장려했습니다.

 

정인보의 조선학 운동이란, 조선의 어떤 문학, 어떤 성과물들을 다시금 정리함으로서 민족의 정통성을 찾는 운동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문집들을 정리하던 여유당전서라던지, 이런 것을 편찬하는 게 30년대까지 이어지고요.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게 있어요. 민족주의 사학은 해석하는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들어갑니다.

 

반면에 실증주의 사학은 말 그대로 실증, 해석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얘기하려 하죠.

 

사실은 일제강점기, 우리가 지금 억압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떤 관점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얘기한다?

 

이는 친일적 성향을 띠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긴 합니다. 어쨌든 이 실증주의 사학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 이병도.

 

이병도가 주도로 만들었던 학회는 진단학회입니다. 진단학보를 발행하기도 했죠.

 

 

 

그리고 30년대의 중요한 사학, 바로 사회경제 사학입니다. 

 

이름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문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느냐?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백남운이 유물사관을 주장합니다. 유물사관의 핵심은 '역사가 발전하는 것은 법칙이다' 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발전단계가 원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자본주의, 마지막으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발전해 간다는 거예요.

 

 

 

즉 인류의 발전은 보편성을 가진 법칙이라고 주장하죠. 백남운의 유물사관은 당시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부정하는 겁니다.

 

식민사관 중에서도 특히나 정체성론, 여기서 정체는 정체성할때 정체가 아니고, 멈춘다 할때의 정체입니다.

 

우리 조선의 역사가 정체해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통해 근대화로 갈 수 있었다는게 일제의 정체성론입니다.

 

한국은 원래 능력 없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죠. 이 정체성론을 백남운의 사회경제 사학으로 비판하는 겁니다.

 

일제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발전했을 거라 말하는 게 유물사관이죠.

 

 

 

사관들은 끝이고, 20년대에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신간회.

 

사회주의 세력을 잡아들이는 보안법, 사상범 구금령등에 의해 합법적 공간이 줄어들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조직이죠.

 

그러나 신간회가 1931년에 해소되고,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할 합법적 공간은 다시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하로 들어가, 혁멍적 성격을 띠는 조합 활동으로 나타나죠.

 

 

 

특히 30년대에 주목해야 될 노동자 투쟁이 있습니다.

 

바로 1931 강주룡 을밀대 고공농성 사건입니다. 이름이 참 긴데, 강주룡은 여성의 이름이고, 을밀대는 지역, 고공농성은 왜 있잖아요.

 

노동자들이 크레인에 올라가서 시위하는 모습. 이걸 고공농성이라 하는데 그 모습의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죠.

 

강주룡 을밀대 고공농성 사건

 

30년 이후 민족말살통치 속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구나~ 느껴지시죠?

 

 

 

이건 국내의 일은 아니지만, 알려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1936년, 해외의 큰 이슈.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올림픽의 꽃이 뭡니까? 바로 마라톤이죠.

 

근데 그 마라톤에서 우리가 우승해버립니다.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완주해버립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잘 아시다시피 식민지였습니다. 어떤 국기를 달고 뛰었을까요? 일장기였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등으로 완주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

 

이를 본 몇 신문사들은 시상대 위로 올라간 손기정의 일장기를 편집으로 지워버립니다.

 

말소본 / 원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던 동아일보도 동참했죠. 이걸 소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30년대의 활동이었습니다.

 

 

 

 

 

근데 남은 드래그 바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40년대 분량은 그냥 없다시피 합니다.

 

그 작은 분량 마저도 거의 복습에 가깝죠.

 

말로는 10, 20, 30년대라고 하면서, 중간중간 뒤의 얘기를 해드린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다행인가요?

 

파편적으로 제공해드린 얘기들을 다시 모아보는 시간이죠.

 

 

 

30년대 최초로 중국 관내에 만들어진 조선 의용대,  그 이동경로를 한번 보여드릴게요. 40년대입니다.

 

 

우한에서 만들었던 부대가 바로 조선의용대. 이 의용대가 어떻게 나뉘었다?

 

단장 김원봉과 일부는 충칭으로 가서 한국광복군으로 합류. 나머지는 옌안 쪽으로 가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기억나시죠?

 

 

근데 조선의용군은 옌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의 산하 부대가 되는데, 이 조선독립동맹을 이끌던 사람이 김두봉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쓰리봉이 등장합니다. 원봉 투봉 쓰리봉.

 

원봉은 의열단 김원봉.  투봉은 조선독립동맹 김두봉입니다. 어렵지 않죠? 

 

쓰리봉은 만주지역에서 배운 조선혁명군의 양세봉입니다.  영릉가, 홍경성 전투에서 승리했었죠.

 

 

 

1940년대에 들어서며 드디어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 일본이 망하고 나면 그 뒤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 것이냐 대한 조직이 하나 만들어집니다.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에요. 이 조선 건국동맹을 이끌고 있었던 인물은 여운형입니다. 신한청년당의 여운형. 맞습니다.

 

 

 

이 조선 건국동맹은, 다음 글에서 배울 텐데 1945년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바뀔 거예요.

 

제가 얘기해드린 조선 건국동맹이라든지, 조선독립동맹이라던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등

 

이 모든 조직들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게 뭐냐면 일제 패망 이후의 나라를 공화정 체제로 운영해야한다. 입니다.

 

합의점을 본 거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던,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새로운 모습들을 만들려는 희망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는 거 보이시죠?

 

과연 우리는 광복, 그날이 왔을 때 어떤 모습으로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다음글에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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