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분량이 정말 많습니다. 평소의 글 분량 하나하나가 10년대, 20년대, 30년대의 각각의 저항과 맞먹죠.
사람 이름도 비슷하고, 단체도 비슷하고 해서 일제강점기 공부가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힘든걸 안 힘들게 해드릴 순 없으니, 그 힘듦을 한 번 정당화해볼까요?
일제강점기 속 저항의 역사가 비어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외울 것도 별로 없고~ 시험에 나올 것도 별로 없어서 좋으신가요? 아니죠?
만약 저항의 역사가 비어있다면, 그 역사는 비겁과 비굴의 역사입니다.
그저 많은 사람과, 많은 단체가 있어서 공부할 양이 많다고 부정적으로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공부할 양이 많기에 우리 일제강점기 속, 저항의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고 보거든요.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외우고 단체 이름을 외우지만 마시고 가슴으로 와닿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역사 앞에서의 기본적 예의겠죠. 그들이 꿈꿔왔던 꿈 속에 저희가 살고 있는 거잖아요?
자신의 청춘, 재산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그 저항. 시작해 보겠습니다.
0-1. 저항의 기본적 흐름
1910년대 저항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3.1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1919 3.1운동이 그냥 빵! 하고 터진 건 아니겠죠?
3.1운동까지 많은 저항의 에너지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3.1운동으로서 표출된겁니다.
일제의 통치 방식을 바꾸기도 한 아주 큰 사건이죠.
그 저항 에너지의 축척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국내와 국외를 나눠서 봐야합니다. 이번에도 상식적으로 접근해볼까요?
나라가 방금 막 빼앗기고, 독립의 정신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떡해야할까요?
바로 독립군의 양성, 독립의식 교육입니다. 즉 군대와 학교가 필요한거죠. 그런데 1910년의 일제 통치 방식은 무단통치입니다.
언론, 집회, 결사 등 모든걸 허용해주지 않는데 군대와 학교가 들어설리 만무합니다. 그죠?
따라서 군대, 학교 설립의 대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1910년대에 해외에서 준비한 독립투쟁이 1920년대에 줄줄이 터지는거죠.
하지만 그렇다고하여 국내에선 아무일도 없던게 아니에요. 그건 국외 이후에 설명해보죠.
1. 국외의 저항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앞으로 있을 항일무장투쟁, 또는 정부 수립을 위해 필요한 단계였죠. 이게 1910년대 국외 활동의 핵심입니다.
국내의 경우, 헌병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다녀서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을 주로 하죠.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 이게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두 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큰 뼈대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지도를 볼까요?

5개의 지역을 표시해놨는데, 4와 5는 지도 여백이 없어서 끌고온 미주(미국), 상하이입니다.
1,2는 옛 고구려 땅인 만주지역인데, 다른 말로 간도라고도 합니다.
이 간도를 동서남북으로 보면 1번 2번이 각각 서간도, 북간도인것이죠.
순번대로 진행해볼까요?
1) 서간도
기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최종목표는 군인들의 양성입니다.
이후에 일제와 맞서 싸워야 한단 말이에요. 그럼 군인이 필요하죠?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선 학교가 필요할 겁니다. 학교는 교육의 목적이 아니어도 필요한거죠. (사관학교라던지)
학교는 그냥 세워지나요?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뭔가 후원해 주는 단체가 있어야겠죠?
따라서 저항 공부의 순서는 이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시면 됩니다.
후원단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그 후원단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학교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그 학교를 통해서 만들어진 군대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후원단체 – 학교 – 군대 순서를 기억하시면 좋겠죠? 그럼 한번 서간도 지역 봅시다.
이 서간도 지역에서의 후원단체는 저희가 배웠던 신민회와 연결됩니다.
애국계몽단체 중에서도 1907년 결성된 대단히 큰 비밀결사 조직.
동시에 다른 애국계몽단체와 달리 공화당을 지지했던 조직,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던 조직. 바로 신민회죠?
신민회 회원들이 이쪽에 건너와서 세운 단체, 경학사가 있습니다.
경학사에 소속된 대표적인 집안이 우당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이 씨 6형제 집안이죠. 일개 집안 얘기를 왜 꺼내냐고요?
들어보세요. 이 씨 6형제들이 살았던 곳은 서울, 주로 명동 지역이었습니다. 명동 땅값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거 아시죠?
이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일대를 이 씨 6형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2조 원에 달했습니다.
이런 거대자본을 가진 이 씨 6형제는 친일세력으로 흡수되지 않고, 이 재산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기금을 마련합니다.
이제까지 나라의 녹을 먹고 잘 살아왔으니, 나라가 망한 지금은 우리가 나서야 할 때라고 하면서요.
그 돈으로 서간도 지역에 와 땅을 사고 후원단체 경학사를 만든 겁니다.
이 경학사가 후원하여 만들었던 학교가 바로 신흥학교. 시간이 흘러 신흥무관학교가 되죠.
이 씨 6형제의 모습을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뭔지 알 것 같죠? 누구보다 앞장서는 모습.
이렇게 신흥무관학교가 만들어지고요. 그다음에 학교를 통해서 만들어진 부대가 있겠죠. 그 군대는 서간도 지역이니까 서로군정서.
다음글, 1920년대의 저항을 배우면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배울 텐데 그 토대가 되었던 부대가 이때 생긴 겁니다.
서간도 지역 봤고요, 북간도 지역 보도록 하죠.
2) 북간도
이 지역도 양상이 서간도와 똑같습니다.
재벌이었던 김약연이 북간도로 넘어와서 집단 마을을 이룹니다. 그들이 만든 후원단체는 중광단.
이 후원단체는 특이하게도 다른 단체에 후원을 받아 만들어진겁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단군을 믿는 종교, 대종교(나철)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죠.
그렇게 만들어진 중광단을 중심으로 학교들이 생깁니다.
구한말부터 1910년대까지 활동했던 서전서숙.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교육합니다.
그리고 이 서전서숙의 맥을 이어서 만들어진 학교가 있으니, 이름부터 동쪽을 밝히기 위한 학교인 명동학교입니다.
식민지 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이라는 교육목표가 명확하죠.
명동학교에서는 글쓰기를 많이 하는데, 반드시 애국과 독립이라는 두 단어가 들어가야만 점수를 매깁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공부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사실 명동학교에서 배출했던 졸업생은 많지 않습니다.
일제 탄압 속에서 결국 문을 닫게 되거든요. 그때까지 배출한 학생이 천여 명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이 천여명 중에서 인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나중에 공부하실 테지만 입이 너무 근질거려 언급만 하고 가죠.
1920년대 많은 사람의 눈물을 쏙 빼놓았던, 민족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 감독 나운규가 명동학교 출신이고요.
별 헤는 밤. 저항시인. 너무 유명한 시인이죠? 윤동주도 명동학교 출신입니다.
명동학교는 학교와 교육의 중요성을 극명히 보여주는 근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학교들을 통해서 만들어진 부대가 있겠죠?
서간도는 서로군정서. 북간도는? 북로군정서입니다. 조금 더 중요한 부대죠. 그다음 대한독립군.
각각 청신리 대첩, 봉오동 전투의 주력 부대가 될 군대죠.
이렇게 1910년대에 준비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1920년대의 항일 무장투쟁에 총성을 쏘아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3) 연해주
연해주.. 보다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가 더 친숙하실겁니다..
이 연해주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건너와서 마을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름 자체도 신한촌.
신한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쪽에서의 후원단체, 자체조직으로는 권업회가 있는데 이름만 봐서는 독립의지가 없어보이죠? 그걸 노린겁니다.

권업회와 그들이 발행한 권업신문, 이와 관련된 대표적 인물은 최재형입니다.
이름이 좀 생소하시죠? 이 얘기를 들으시면 앞으론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시간을 조금 전으로 돌려서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처단합니다.

근데 궁금하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쏠 수 있도록 비용이며, 숙식이며 후원해 준 누군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인물이 바로 최재형 선생입니다. 최재형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주 성공한 재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사람은 연해주로 많이 가는 모습이 나타나죠.
왜? 최재형 선생이 막 도와주니까요. 최재형 선생의 별명이 뭐였냐면, ‘고려인들의 페치카’
페치카는 난로입니다. 그 당시 건너왔던 고려인들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줬던 인물이죠.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들의 집에 가면 사진들이 걸려있었습니다. 마치 북한이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걸어놓는 것처럼요.
그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최재형 선생은 노비출신이에요.
노비출신이면 솔직히 말해서 차별을 받았던 집안이라, 나라가 해준 게 뭐가 있냐며 외면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서 이 지역의 한인들,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분이죠. 꼭 기억해야겠죠?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던 본부가 있다면 대한광복군 정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물론 오래는 못 갑니다.
이 대한광복군 정부를 이끌었던 사람이 이상설, 이동휘 이런 분인데. 여기 또 이상설이 등장하죠?
북간도에서도 서전서숙 교사로 나왔잖아요. 헤이그에도 갔다 오기도 하고요. 대단하죠?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는 또 다른 조직, 대한국민의회도 연해주에서 등장합니다.
4,5) 미주 + 상하이
이 둘은 설명할게 별로 없어서 한 번에 가겠습니다.
미주는 우리나라 최초 공식으로 이민을 갔던 지역입니다. 어쩌면 낯선 환경에서 먹고 살기도 바쁠테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제 한몸 바치죠. 해외에서 무슨 노력을 할 수 있냐고요?
나중 대한미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이야기지만, 임시정부에서 독립공채를 발행할겁니다.
독립이 되면 돈을 지불하겠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사기에 가깝죠.. 일제는 열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독립공채를 1만여명이 채 되지않는 미주인들이 몽땅 사갑니다.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금전적 지원 뿐만 아니라,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도 조직됩니다. 안창호 선생이 여기 소속이죠.
하와이에서는 아예 군대, 대조선국민군단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육성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말이죠.
이 지도에 표기된 모든 한인들은 사실상 재외동포인데, 정말 남 같지가 않은 분들입니다.
안창호, 윤동주가 재외동포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무슨 소리야! 한국인이지! 와 같은 반응이 나오시나요?
역시 재외동포라는 단어는, 약간 전통적 이미지와는 벽이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의 한국, 그리고 당시 일제강점기로부터의 광복을 위해 제 한 몸 바쳤던 사람이라는 점.
어쨌든 미주 지역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활동하고 있었고요.
상하이는 1919 3.1운동과 연관이 깊습니다.
3.1운동 이전에 신한청년당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사에서 계속 등장할 여운형도 속했었죠.
이 조직이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토대가 되는 조직입니다.
1910년대에 국외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죠?

단순히 사람들의 이름과 단체가 많다고 해서 투정 부리시는 분은 없길 바라며.
오히려 이렇게 많은 분과 많은 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자랑스러울 수 있구나~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 국내의 저항
1919 3.1 운동 이전에 국내에선 어떤 활동이 있었을까요?
헌병 경찰, 무단통치. 절대 절대 쉽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직이 있습니다.
아까 설명 중에도 나온 단체인데, 1911년까지 비밀결사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 조직이 어디죠? 신민회입니다.
105인 사건이 대체 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씌워 신민회를 탄압한 사건인데. 수뇌부 105명을 다 잡아들입니다.

당연히 신민회는 와해되고 말죠. 그런데 이런 비밀결사 활동을 하던 게 신민회뿐만 아니라 정말 많습니다.
학생들의 조직, 선생들의 조직, 여기저기서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조직을 보겠습니다.
먼저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비밀결사조직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임병찬이 이끌었던 독립의군부가 있습니다.
‘의’ 자가 들어가니깐 의병느낌이 들죠? 의병은 위정척사랑 연결되어있잖아요?
즉 이름부터 성리학적 질서, 옛 질서를 복원하려는 느낌이구나 ~ 를 깨달으시면 됩니다.
실제로 임병찬은 고종에게 밀지를 보냅니다. 고종은 너희만을 믿는다고 답하죠.
또 국권반환 요구서를 청독부에 제출하려고도 했죠. 이 독립의군부의 키워드가 있다면 복벽주의입니다.
복벽주의란 아까 말한 옛질서랑 똑같아요. 옛 체제로 돌아간다. 이게 복벽주의거든요.
그리고 경상도에서 특히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한공복회. 박상진이라는 인물이 이끌었습니다.
대한광복회가 지향하고 있었던 정치체제는 독립의군부와 다릅니다.
옛날 전제왕권 체제로 돌아가려하는 복벽주의를 보인 독립의군부와 달리 공화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걸 목표로 만주지역에 사관학교를 세웁니다. 어찌 보면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는 모습이죠?

하나 얘기해드리자면, 박상진 이분은 이력이 되게 독특합니다. 무려 판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판사로 활동하던 박상진은 경술국치 이후에 사표를 냅니다.
사실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 기존 조선의 엘리트를 앞세워서 통치하는 방식은 일제에게 되게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나라가 망하는 순간부터 똑똑한 엘리트들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소리입니다.
실제로 그 길을 갔던 반민족행위자가 정말 많죠. 그런데 박상진은 사표를 던집니다.
내가 있을 자리는 판사가 아니라, 판사 앞자리다.라고요...
사표를 내고 대한광복회를 이끌다가 결국 약속대로 10년 뒤, 1921년 일본 판사 앞에 앉게 된 박상진.
그렇게 일본판사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던 분입니다.
인물이 정말 많지만, 정말 한 분 한 분 가볍게 넘길 수가 없네요.
이렇게 1910년대의 저항이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드디어 에너지가 모여 1919 3.1. 대한독립만세~ 폭발하게 됩니다.
3. 3.1운동
저에게 혹시 반만년의 역사를 두 시기로 나눠보라고 한다면 저는 3.1 운동을 말할 겁니다.
A: 3.1운동은 1919년으로, 이미 반만년의 99%가 지났는데 이 3.1운동으로 그 이전의 역사와 이후를 얘기하는건 과하지 않나요?
3.1 운동 이전까지 반만년 역사에서 존재했던 대부분의 나라 형태는 왕국이고 제국이었습니다. 왕의 나라, 황제의 나라였죠.
근데 3.1 운동 이후에 반만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한 번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나라가 등장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등장하는 겁니다. 왕국도, 제국도 아닌 민국입니다. 국가의 주권이 친초로 국민에게 설정됩니다.
그래서 3.1 운동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눈썰미가 좋으신 분이 있다면, 제가 여태 단 한 번도 시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장장 30편의 글이 넘는 동안. 단 한 번도요.
왜냐? 3.1 운동 이전에 살고 있었던 수동적인 사람. 왕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백성이라 합니다.
반대로 3.1 운동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이라고 부릅니다.
능동적 존재이자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죠.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고, 여러분들은 시민입니다.
그 대한민국과 시민역사의 출발점이 언제다? 3.1 운동이다! 정말 중요하죠?
우리의 정체성의 출발이 3.1 운동이기 때문에 그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반으로 나누는 분기점으로 꼽은겁니다.
이 3.1운동은 아까 말했듯, 그냥 터진게 아닙니다. 국내나 국외나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죠.
먼저 국외의 상황을 보면. 당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있었던 1차 세계대전이 끝납니다.
전쟁이 끝나자 전후 질서를 어떻게 할 것이냐 에 대한 논의가 파리에서 이뤄집니다. 그것이 바로 파리강화회의죠.
이 파리강화회의는 창세기와도 같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히 이 당시 식민지였던 약소국가의 대표들이 대거 파리로 몰려듭니다.
식민지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국의 안건을 파리에 가져가서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때, 미국 대통령이 무엇을 제창하냐면.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옵니다.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민족이라는 개념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것이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 라인에 섰던 나라는 일본입니다.그 말은 곧 우리의 독립은 계속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서 우리한테 해당 사항은 없어졌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죠.
이 김규식을 파견했던 역할을 했던 곳이 아까 말씀드렸던 상하이의 신한청년단입니다.
김규식을 파견함과 동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우리도 선언합니다.
일본의 중심도시인 도쿄에서 1919. 2.8 독립선언을 낭독하죠. 이 바람이 국내로 밀고 들어와 전개된게 3.1운동입니다.
즉 3.1 운동의 국제젹 배경은 파리강화회의 김규식 파견 + 도쿄 2.8독립선언.
또 당시 국내에서는 고종의 인산일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원래 고종의 장례식은 3월 3일이에요. 월요일이었죠. 이게 왜 3.1로 이틀이나 앞당겨졌느냐?
일단 성리학의 틀을 못버린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고종의 장례식날 만세를 외치는게 마음에 걸렸나봅니다.
그래서 날짜를 하루 당겨요. 근데 당기고보니 일요일인겁니다. 종교행사가 있어서 또 하루 앞당기죠.
최종적으론 3.1이 된건데 오히려 1일이라서 더 뭉클한 느낌입니다.
만세운동의 비하인드 스토리, 꽤 흥미롭죠?

아무튼 3.1, 큰 규모의 장례식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곤 동시다발적으로 만세를 외치죠.
잘 알고 계시겠지만 3.1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를 합니다. 그러나 3.1운동을 끝까지 주도하지는 못해요.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자수한 뒤 끌려가버려서 더이상의 지도는 하지 못하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거족적 민족항쟁, 3.1 운동을 준비하고 기획했다는 것을 절대 무시할 수 없죠.
이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없고 반드시 존중해야 할 사실입니다.
3.1운동은 원래 비폭력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칼로 찌르고, 총을 쏘는등 너무 심하게 탄압을 하죠.
이런 상황 속에서 비폭력으로만 가면 죽습니다. 자연스럽게 폭력시위로 전환되는 모습.
당시 한인들의 인구는 2천만이었습니다. 근데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자그마치 200만 명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그 이전까지 전국에서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왔던 적이 없어요. 처음 있는 일이죠.
그러다 보니 처음 있었던 대사건 이후에 일제의 통치는 바뀔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초기에는 어마어마한 탄압이 이어집니다 그중에서 기억하셔야 할 대표적인 탄압은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이라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만 기억하시는데, 제암리와 고주리는 묶어서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제암리에 일제 헌병들이 우그르 가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고, 불을 지르고 총을 쏴 죽입니다.
그리고 바로 고주리로 이동해요. 옆동네였거든요. 가서 사람을 또 죽여요.
그래서 제암, 고주리 학살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사건을 명확히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3.1 운동은 굉장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첫째,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다는 것.
여러분, 본인의 생일은 다 알고 계시죠? 하나 더 외워도 문제 될 거 없습니다.
민국의 탄생일, 4월 11일 정도는 알아둡시다. 여러분이 사는 나라의 생일 정도는 알고 계셔야죠.
더욱이 여러분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분들이잖아요?
근데 사실 그저 기억하라고만 하면 힘들죠. 4월 11일이 노는날이 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광복은 빨간날이어서 누구나 기억하잖아요? 쉬는 날이니까!
노는 날 없는 4월에, 하루정도 쉬어준다면 전 국민이 이 날을 기억할 텐데 말이죠.
아무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 이게 3.1운동의 가장 큰 의의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아까 설명드린 민족대표 33인과 관련있어요.
이들이 끝까지 지도하지 못하고, 잡혀간다 했잖아요? 그래서 3.1운동을 일으키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족적 민족항쟁이기는 하지만, 산발적 시위로 끝나버리는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말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렇게 탄생한겁니다.
사실 이런 정부의 형태는, 앞에서 연해주 지역의 대한광복군 정부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를 포함한 여러 정부가 있었는데 이 정부들이 합쳐져서 만든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죠.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파트가 끝난 뒤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다음 기억해야 할 3.1운동의 영향은 바로 일제의 통치방식 변화입니다.
아주 기만적인 정치이긴 했지만 바꿔냈다는게 중요하죠.
그다음 세계의 민족 해방 운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3월1일, 조선에 불이 붙자 중국이 움찔합니다.
작은 나라 조선에서도 저렇게 하는데 우리도 하자! 하며 5.4운동을 일으키죠.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3.1 운동의 결과.
대한민국라는 국가가 탄생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겼습니다.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떤 일을 했는지만 보고 글을 끝내죠.
| 계기 | 결과 |
| [국외] 윌슨 : 민족자결주의 선언 파리강화회의 : 김규식 파견 (신한청년당) 도쿄 2.8 독립 선언 [국내] 고종의 인산일 민족 대표 33인 |
제암,고주리 학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민족대표 33인 구금) 통치변화 :무단통치 - 문화통치 중국 5.4 운동 |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쫙 훑어볼 겁니다.
저항은 워낙 분량적으로 많아 나눠서 하지만, 임시정부는 한 번에 끝까지 해볼겁니다.
저항, 임시정부를 둘다 나눠서 하면 헷갈리니, 이번 기회에 1919 4.11에 출발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을
1945년 광복까지 관통하여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3.1운동이라면 의의는 뭘까요?
바로 최초의 3권 분립과 이에 기초한 공화정 체제입니다.
이때까지 신민회, 대한광복회등 공화정을 지향한 단체는 많았지만, 실제로 등장은 이번이 처음이죠.
3권은 입법. 사법. 행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 조직들이 상하이에 있다 보니 국내와 연결이 필요하겠죠?
그 연결선을 만든 조직이 있어요. 그 조직이 연통제와 교통국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연락망 기구)
연통제는 행정망, 교통국은 정보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국내와 연결을 하고, 국외로는 우리의 사실을 알리는, 즉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독립신문을 만듭니다.
A : 독립신문은 독립협회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것도 맞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독립신문을 만듭니다.
이름 똑같으면 안 되나요?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독립밖에 없잖아요.
그다음에 우리의 정통성 있는 역사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만듭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죠?
즉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지역이라 일본인이 함부로 누군가를 잡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치외법권을 이용해 외교활동을 펼치기 쉬웠습니다. 미국과 외교하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기도 하죠.
잘 아시겠지만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니고 임시정부입니다. 그러고보니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때도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군요.
자그마치 3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한겁니다.
정말 순조로운 출발이죠? 그래프와 함께 봅시다.

어, 근데 저기 나락 구간은 뭐죠?
맞습니다. 순조롭게 출발한 임시정부는 얼마안가 어려움들을 맞이합니다.
먼저 국내와의 연락망인 연통제, 교통국이 일본에 의해 와해되는 모습.
그리고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을 만들기로 결정했거든요?
이승만이 이 국제연맹에 우리의 운명을 해결해달라며 청원을 넣었습니다.
근데 이 사실이 국내에 나중에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 이후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의 독립을, 우리의 운명을 왜 국제연맹에 맡겨? 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반감이 퍼지는거죠.
외교에 포인트를 두고 시작한 임시정부, 잘 굴러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조직은 와해되고, 외교적인 역량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대로 괜찮은가! 이런 식으로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던 회의가 있습니다. 그 회의가 1923년 국민대표회의입니다.
과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
그런데 국민대표회의에서 크게 두 세력이 부딪힙니다. 창조파, 개조파로 나뉘게 되는데
창조파의 대표적 인사는 앞으로 계속 등장할 신채호입니다. 개조파의 대표적 인사는 안창호입니다.
각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창조파 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하는 게 없다. 없애고 새롭게 시작하자' 해서 창조입니다.
개조파는 그럼 개조겠죠?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로서, 없애는 것은 안된다.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바꿔나가야 하는 게 맞다'
이렇게 둘로 나뉘어 국민대표회의가 격렬하게 전개가 되는데.. 결과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해요.
그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합니다.
이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바뀌려고 노력합니다.
1925년에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제2대 대통령으로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이 취임합니다.
물론 모두 임시니까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은 48년의 이승만 대통령이 맞습니다.
이 박은식 선생을 임시로 앉힌 후, 대통령제는 너무 권력이 몰아져있다며 의원내각제로 개헌을 합니다.
영국과 일본이 이 형태죠? 국회가 행정을 장악하면서 국회의 집권당이 모든 것을 해나가는 모습.
일본 같은 경우 자민당, 아베잖아요? 천황은 아무 힘도 없고요.
당시의 임시정부도 힘이 몰리는 걸 막기 위해 국회로 분산하려는 노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27년에 다시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의 형태. 국무위원(지금의 장관)을 중심으로 운영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점점 떡상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여기까지의 그래프를 보면

그럼에도 '임시정부의 존재가 있느냐' 와 같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 살아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김구가 만들었던 조직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한인애국단이죠. 한인애국단의 단원들이 이봉창, 윤봉길입니다. 다들 잘 아시죠? 폭탄투척하면 떠오르는 인물들.
이봉창은 도쿄에서,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집니다.
여기서 이봉창은 실패하지만 윤봉길은 완벽히 성공하는 바람에 판도를 뒤집게 됩니다.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소식을 들은 장제스 (당시 중국을 이끌던 인물)는 , 중국 100만 대군도 할 수 없는 일을 감히 한국청년이 해냈다며 임시정부를 전폭적 지지하게 됩니다.
동시에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전폭적 지원을 시작하며 임시정부가 다시 기사회생한 것이죠.
계속 추락을 거듭했던 임시정부가 다시 올라올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윤봉길의 폭탄투척이란 겁니다.
문제는 뭐냐면, 상하이에서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다 보니까 일본은 도저히 임시정부를 가만둘 수가 없는 겁니다.
치외법권을 신경쓰지 않고, 윤봉길 의거 이후 32년에 아예 침략해버려서
더 이상 상하이에서 활동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깐 이동해요.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대장정의 시간, 무려 6천 km의 대장정을 합니다. 임시정부가 이동하는 거예요.

편한 이동이었을 거 같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는 폭격이, 뒤에서는 총탄이, 옆에서는 밀정이, 임시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엄청난 압박을 진행하거든요.
저는 이 대장정을 보고 달팽이를 떠올렸습니다.
1919 3.1 운동의 결과로 탄생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등에 지고, 그 위험한 여정을 천천히, 아슬아슬하게 가는 달팽이..
결국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고 조직을 다시 정비하게 됩니다. 이때 개헌을 통해 주석체제로 전환합니다.
의원내각제, 집단지도체제를 거쳐 1인지도 체제로 돌아온겁니다.
한인애국단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실상부한 대표가 되었던 김구가 중심으로 개헌을 했죠.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을 만듭니다.
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지청천으로 하여금 이끌도록 하죠. 1930 이후 항일무장투쟁 글에서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1940년, 군대도 만들고 여당을 만드는 시스템의 정비 단계를 거쳐 1941년을 맞이합니다.
1940년대가 되면 일제가 전쟁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잖아요? 일본이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까? 하면서 1941년, 건국강령을 반포합니다.
이 건국강령에는 삼균주의의 원칙이 들어갑니다.
우리나라가 새로 출발하게 되면 정치, 경제, 교육에서 누구나 다 균등한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죠.
이걸 외쳤던 인물이 조소앙입니다. 건국강령을 반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세를 몰아 일제에 선전포고도 합니다.
그렇게 1942년이 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명실상부 한국의 중심에 서게 되죠.
근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했던 또 다른 조직이 있었거든요?
민족혁명당이라고, 어떻게 보면 임시정부보다 더 큰 조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있었던 인물은 김원봉인데, 이 어마어마한 인물은 다음 글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이 김원봉이 194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합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있었거든요? 이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함께 끌고옵니다.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1943년에는 말이죠, 영국이 우리 임시정부에 인도 미얀마 전선에 한국광복군을 투입해 달라 요청하는 겁니다.
우리도 바쁜데, 투입해줄까요?
투입해줍니다. 왜냐면 영국이 일본과 싸우고 있었거든요.
다음 1944년, 이때 개헌을 또 합니다. 김구가 완성해둔 주석체제에 , 부주석을 추가합니다.
주석에는 김구, 부주석에는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인물이죠?
45년에는 미국 oss부대와 함께 한국광복군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죠. 우리의 힘으로 광복한게 아닌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처음과 끝, 1919 - 1945년까지 속성으로 완주해봤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말보다는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리고 싶네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작부터 1945년 충칭에서 국내로 들어올 때 찍었던 사진이 있어요.
충칭 임시정부 계단에서 찍었던..

그 몇 십 년 동안 고생을 하면서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계시더군요.
태극기를 들고 자신들이 되찾으려 했던 나라로 돌아가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쨌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셨던 모든 분께 리스펙,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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