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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국권 침탈과 저항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이번 글은 가슴 아픈 글 TOP2입니다. 1876년, 개항기부터 꾸역꾸역 버티던 조선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는 글!

 

TOP1은 당연히 일제강점기 글이겠죠? 나라가 망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 5명을 을사오적이라 합니다.

 

근데 대부분의 사람이 일제강점기는 가슴아파 하면서 을사오적이 누구냐 물어보면 이완용까지밖에 안나오더라구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완용 ............. 더 나와야죠!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까지. 육두문자가 나오는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유독 조선 후기, 개항기로 접어들면 내용이 생소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글을 시작할 때도, 글을 마칠 때 정리한 것처럼 앞의 내용을 간단히 복습하려합니다.

 

 

우선 1876,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이 강제로 열렸습니다.

 

말이 강제지 당시 집권세력인 민 씨 세력 자체가 개화파여서 수락한 것도 맞습니다.

 

이 개화파가 1882 임오군란의 진압에 청을 불러들이면서,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죠.

 

고문을 파견하고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는 등,  뒤이어 일본과 제물포, 조일수호속약이 체결되자 개화파가 극명히 나뉩니다.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위상이 국가 대출 실패로 소실되어 갈 때쯤, 때마침 청의 군대가 프랑스,베트남때문에 일부 철수합니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급진개화파들은 우정총국 오픈 기념회에 모인 온건개화파들, 특히 민 씨 세력들을 무참히 베어버리죠.

 

1884 갑신정변입니다.  정권을 잡은 뒤 14개 조 개혁안을 선포하여 다음을 주장했었죠

 

재정의 일원화, 신분제 폐지, 혜상공국 폐지, 규장각 폐지, 지조법 개혁 등

 

하지만 민 씨 세력의 청나라 SOS 덕분에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죠. 이 때문에 청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지고요.

 

이 갑신정변을 청이 제압하는 당시, 급진개화파를 도와주던 일본 병력과의 소규모 전투 이후 일본과 청이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

 

각국의 병력이 조선에 출동하면, 양국에 통보하기로요. 그리고 불탄 일본 공사관을 조선에 더러 배상하라며 한성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렇게 위로부터의 개혁,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10년이 지난 1894,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집니다

 

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또 청나라가 들어오고, 갑신정변 당시 맺었던 톈진 조약에 의해 일본도 들어오죠.

 

근데 이때 일본은 청에게 창덕궁 전투에서 패배한 설욕을 갚기 위해 칼을 갈고 있던 상태였고요.

 

동학농민운동은 진압할 필요도 없이 정부와 농민들의 화해로 끝이 났지만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 갑오개혁도 시행됐습니다.

 

1차, 2차로 나뉘어 진행된 갑오개혁은 현재 근대적 모습을 구성한 기틀 개혁이라 볼 수 있었죠.

 

이 과정에서 청일 전쟁에 이긴 일본이 더욱 간섭을 시도하자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도움을 청합니다.

 

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말았죠.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은 1895 을미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렇게 외세를 끌어들이다 죽은 명성황후를 보고, 고종은 아예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갑니다. (아관파천)

 

그 시기에 만들어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등으로 힘을 가지자 돌아오라고 하고, 돌아온 고종이 1897 대한제국을 선포.

 

하지만 백성을 믿지 않은 고종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혼자서 광무개혁을 단행하기까지.

 

얼추 정리가 되셨으려나요? 광무개혁은 러시아와 일본의 팽팽한 대립관계 속에 가능했다는 점.

 

그런데 이 러시아와 일본의 균형이 깨져버리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오늘의 글. 시작합니다

 

 

 

 

1. 러일 전쟁과 국권 침탈

 

1904 러일 전쟁의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일본이 이깁니다.

 

전쟁의 원인은 러시아와 일본의 팽팽한 균형 속에서 1903년, 러시아가 용암포 지역을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원래 러시아는 그 지역의 나무만을 벌목하여 가져가고 있었는데 아예 지역을 가져가겠다고 했죠.

 

그러자 일본이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세력균형 속에서 상대국의 이익을 단 하나도 내어주지 않으려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죠. 

 

그 으르렁의 결정타가 바로 용암포 조차 사건인 겁니다. 일본은 내심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삼국간섭으로 요동 지역을 잃었잖아요?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 아무튼 이렇게 전쟁이 시작되는데..

.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요구한 게 많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군사용지를 요구하는 한일의정서를 들이밉니다. 전쟁하면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토지가 필요하니까요.

 

일일이 허락받으며 쓰기는 힘들다고 아예 마음껏 쓰겠다는 요구를 한 건데 이걸 체결합니다.

 

 

 

그러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합니다. 핵심 내용은 고문 통치.

 

.일본이 재정 고문 메가타,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파견합니다.

 

스티븐스는 일본이 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 하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다녔죠.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하면서 2차 한일협약을 체결합니다. 

 

1905년에 체결된 2차 한일협약은 아마 이 단어가 더 익숙하실 텐데, 을사늑약이라고도 합니다.

 

을사년에 아주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약이라 하여 을사늑약이라고도 하죠. 을사늑약의 핵심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 강탈입니다.

 

그리고 고문의 다음 단계인 통감 정치가 시작됩니다. 사실 이 을사늑약 때 조선을 다 잃은 거나 다름없었죠.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체결하러 가는데, 조선이 개입할 수 없다는데 이게 나랍니까?

 

이 1905 을사늑약에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들입니다.

 

 

 

근데 을사늑약을 체결하던 당시에 고종이 여기 도장을 스스로 찍지는 않습니다.

 

고종이 저항을 하긴 했네? 라고 보실게 아니라, 아주 괘씸하게 봐야합니다.

 

백성들의 독립협회를 다 해산시키고, 자기 혼자 하겠다고 선언한 주권자 고종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고종이 고작 소극적 저항..

 

‘ 난 도장 안 찍었는데? ’라는 것으로 면피를 한다? 가당키나 한 얘기입니까.

 

 

 

아무튼 이때 자기는 도장을 안 찍었다며 이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합니다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포함한 헤이그 특사를 보내죠.

 

이준/이위종/이상설

 

하지만 오히려 이게 문제가 됩니다. 을사늑약의 내용이 뭐였죠? 외교권 강탈입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되었는데, 외국에 특사를 보내는 외교행위를 한다며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순종을 황제 자리에 올리죠. 동시에 한일 신협약을 체결합니다. 다른 말로 정미 7조약이라고 합니다.

 

1907년이 정미년이거든요. 이 정미 7조약의 핵심은 군대를 해산시키는 겁니다. 다 뺏기네요 아주.

 

그리고 차관정치가 시작됩니다. 흐름 보이시죠? 고문정치, 통감정치, 차관정치로 점차 더 강하게 한반도를 잡아먹는 모습.

 

 

 

외교권도 가져가고 군대도 해산시킨 뒤, 이젠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강탈해 갔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조선?

 

그러면서 마지막 1910년, 경술국치를 체결하며 나라가 완전히 식민지가 됩니다.

 

정확히 1910년 8월 29일. 이런 건 기억해 두시면 좋겠죠. 공부가 아니라 인간적으로요.

 

여러분, 광복절이 언제냐 물으면 1945년 8월 15일~ 술술 나오죠?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은 모두들 알고 있지만 나라를 빼앗긴 나쁜 기억은 달력에도 나와있지 않죠.

 

더더욱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근데 이렇게 나라가 망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망하나 보다~ 이러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여기에 맞선 저항들이 많은데 어떤 저항들이 있는지 하나씩 살펴봅시다.

 

 

 

 

 

2. 일본에 대한 저항

 

조약체결 과정에서 개별적인 저항도 있었고, 단체적인 의병 저항도 있었습니다. 

 

워낙 저항의식이 불붙어서 여러 일들이 많으니, 알려드린뒤 또 흐름표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2-1. 개별적 저항

우선 을사늑약, 이때 나라가 망하는 수준까지 갔잖아요?

 

자결을 통해서 저항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되게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민영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인들 중에서도 장지연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지은 글이 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인데, 당시의 신문 황성신문에 실은 겁니다.

 

을사오적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명백히 비판하는 글을 실어버리죠.

 

 

심지어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던 대신조차도 비판합니다? 왜? 말로만 ‘나는 반대요~’ 이렇게 면피하고 끝이었기 때문이죠.

 

외교권이 넘어가는 순간에 반대한다고 말만 하면 그게 다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을사오적들을 처단하자며 오적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합니다. 나철, 오기호 등을 중심으로요.

 

을사늑약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죠? 

 

 

 

쭉 가다가 정미 7조약이 체결될때는 어떤 저항이 있었냐면 장인환,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합니다.

 

스티븐스 기억나시죠? 1차 한일협약 때 파견되었던 외교 고문 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랍시고 전 세계에 떠들고 다니던 스티븐스를 가만두어선 안 되겠다 죽인겁니다.

 

근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 장인환과 전명운은 그저 개인적으로 스티븐스를 암살하러 샌프란시스코로 간거였습니다.

 

그들이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죠.

 

심지어는 전명운이 먼저 총을 쏘는 그 순간까지도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명운이 쏜 총이 오발인지 잘 나가지 않아 결국 전명운은 달려 나가 스티븐스와 육탄전을 벌입니다.

 

그때 또 총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장인환이 쏜 총이죠. 이 총격 속에 스티븐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정말 영화 같죠?

 

 

 

그다음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죠.

 

안중근 선생님은 나라가 독립되면 고국으로 돌아가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으나 아직도 그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선생님의 가묘(유해를 찾으면 안장시킬 수 있는 공간)는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튼 이런 개인적 저항의 모습들, 이런 정신들이 어디로 연결되냐면 일제강점기로 넘어가 의열투쟁에 연결될 겁니다.

 

표를 보시면 알 수 있듯, 조선이 휘청이는 고비고비마다 사람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고 나름의 항쟁을 했다는 점.

 

 

 

연표 흐름도 + 개별적 저항

 

 

 

 

2-2. 조직적 저항

 

이번엔 조직으로 행해진 저항들을 살펴봅시다. 혹시 애국계몽운동 들어보셨나요?

 

국민의 실력을 키워 빼앗긴 권리를 되찾자. 의 모토를 가진 애국계몽운동은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활성화됩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여러 약조를 맺고, 우리는 일본의 영향력으로 급속도로 빨려 들어갔죠.

 

많은 사람들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애국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사회진화론인데, 즉 힘이 있어야 생존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되게 위험한 말이죠?

 

힘이 없으면 사라지는 게 정당화되는 게 절대 아닌데 말이죠. 어찌 본다면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일 수도 있죠.

 

‘우리는 힘이 세고, 너희는 열등해. 그러니 없어져도 돼’ 처럼 강한 자들이 횡포 부리는 걸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더 적합하죠.

 

 

 

아무튼 이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우리도 실력을 키우자고 합니다. 

 

사람들은 실력을 올리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택할까요? 교육, 언론, 식산흥업의 발전을 도모합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런 상황이 되었으며 (교육) 세상의 정세를 알리고 (언론) 경제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부를 창출해야 힘을 가진다.

 

이게 애국계몽운동의 핵심입니다.  이 애국계몽운동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이 시기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모습을 가리킵니다.

 

 

어떤 단체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죠. 쭉 가서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시작해 봅시다.

 

첫째로 보안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시켰던 단체기도 합니다.

 

아까 말씀드려서 아시겠지만 일제는 러일전쟁 기점에 조선의 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일의정서 - 군사용지)

 

러일 전쟁을 승리하면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니 미리 진출할 수 있는 땅을 가지려 하는 거죠.

 

실제로 1908년 ,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서 아예 노골적으로 그런 행위를 합니다.

 

황무지도 달라~ 군사용지도 달라~ 이런 모습들을 보이는 일본을 저지하는 단체가 보안회였습니다.

 

이 황무지 개간권 반대에 앞장섰던 또 다른 조직, 농광회사도 있습니다.

 

 

그다음 헌정연구회, 이름부터 헌법과 연결되죠? 이 당시 관심 주제가 입헌군주제였거든요.

 

이전까지는 전제왕권이었잖아요? 전제왕권은 왕이 먼저, 그 아래에 법 / 입헌군주제는 법이 먼저, 그 아래에 왕

 

지금 영국이나 일본이 입헌군주정이잖아요. 정확히 똑같은 시스템입니다.

 

영국엔 여왕이 있고, 일본에도 천왕이 있지만 그들은 상징적 존재일 뿐이고 총리나 수상이 실제로 정치를 하죠.

 

 

 

입헌군주정을 우리도 도입하자는 주장을 하는 조직이 헌정연구회입니다.

 

이 조직의 활동을 보면, 당시의 매국조직, 일진회를 강력하게 성토하고 비판했었죠. 말 그대로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것들입니다.

 

당연히 헌정연구회는 을사늑약도 반대하고 비판하겠죠. 이 헌정연구회 뒤를 이어서 나왔던 단체가 대한자강회입니다.

 

 

 

이 대한자강회 역시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정을 지향하고 있는 모습. 전국에 지회를 갖고 있고, 월보도 가능한 큰 조직이었습니다.

 

자강이라는 키워드만 나오면 대한자강회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특히 이 대한자강회과 힘을 얻은 이유가 뭐냐면 고종의 강제퇴위입니다.

 

이 고종의 강제퇴위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의 조직이었죠. 이 활동 때문에 당시 보안법이 만들어지기까지 할 정도니까요.

 

결국 보안법의 적용에 의해 대한자강회는 해체되고 맙니다. 고종의 강제퇴위, 보안법과 연결 지어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단체이자, 애국계몽활동의 하이라이트. 신민회가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이는 비밀결사조직이었는데, 여기서 활동했던 인물들을 들어보면 안창호, 양기탁 등이 있습니다. .

 

그런데 나중에 알려드릴거지만 105인 사건으로 해체가 됩니다. (1911)  이 신민회의 활동이 애국계몽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앞에 말했던 교육, 언론, 식산흥업을 그대로 실시하죠

 

교육으로는 대성학교(안창호), 오산학교를 세우고  식산흥업과 관련해서는 자기 회사(도자기), 태극서관(책 출판) 등을 세우죠.

 

양기탁 같은 경우는 대한매일신보, 언론사를 움직이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 신민회가 애국계몽운동을 하는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먼저 신민회에서 지지하고 있던 정치 체제가 공화정입니다. 공화정이라 함은 왕이 없는 겁니다.

 

국민이 대표를 뽑아서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형태, 즉 지금의 대한민국 공화국을 주장하던게 신민회였습니다.

 

그다음에 서간도 지역에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무장투쟁을 준비한다는 거죠?

 

 공화정 지지와, 무장투쟁을 준비한다는 게 개항기 속 다른 조직들과의 큰 차이점이죠.

 

 

근데 1920년대에 신간회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름이 비슷해서 늘 시험에 잘 나옵니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신민회고, 신간회는 1920년대 좌우합작운동 즉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물이라는 차이점 꼭 기억!

 

(구한말 =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 말기라는 뜻)

 

애국계몽운동의 교육하자 언론하자 식산흥업하자~ 정신은 쭈욱 연결돼서 일제강점기의 실력양성 운동으로 연결됩니다.

 

연표 흐름도 + 조직적 저항

 

 

 

 

 

 

 

2-3. 의병 투쟁

 

이렇게 애국계몽 조직들도 있는 반면, 지금 나라가 망하는 상황인데 언제 실력을 키워. 맞서 싸우자! 하는 의병 조직도 있었습니다.

 

의병은 위정척사의 계열에서 나온다고 설명드렸었습니다.

 

예를 들면 강화도 조약, 개항에 결연히 반대했던 최익현. 도끼를 들고 강화문 앞에서 자신의 목을 먼저 치라는 저항을 보여주죠.

 

개화반대 속에서 일어난 영남만인소 사건도 있었죠.(미국과의 수교에 반대)

 

이렇게 반대 반대 반대 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실력투쟁으로 나오는 모습.

 

 

첫 번째 의병은 을미의병. 을미개혁과 을미사변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을미개혁은 단발령을 시행했었죠? 이 단발령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게 추세지만, 이때는 상투를 트는 게 시대의 문화였죠

 

근데 이 문화를 순식간에 그만둬라? 아노미입니다. 결국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죠.

 

단발령, 을미사변 - 을미의병

 

을미개혁의 단발령에 대한 반발 + 을미사변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게 을미의병입니다.

 

특히 양반 유생인 윤인석, 이소응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납니다. 양반들에겐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가 더 컸거든요.

 

 

하지만 나중에 고종이 아관파천을 할 때 갑오, 을미개혁의 일부를 무효화시킴과 동시에 단발령도 폐지시킵니다.

 

그러면서 고종이 을미의병에게 해산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의병. 을사의병은 외교권 박탈에 저항한 모습입니다.

 

그럼 을사의병의 배경은 뭐다? 을사늑약. 이때 활약했던 인물들을 최익현, 민종식 등 여전히 양반 출신들이죠.

 

그런데 평민의병장 출신의 신돌석이 있습니다. 이름부터 양반은 아닌것 같죠?

 

그래서 을사의병은 의병장 중에서 평민출신이 등장하고 있다는 의의를 가지기도 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분이 따로 없다며 평민들도 대거 참여하죠.

 

 

 

 

세 번째 의병이 정말 대단한 의병인데, 정미의병입니다. 이름부터 정미의병이니 배경을 아시겠죠?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근데 정미의병이 왜 대단하냐면, 정미 7조약에서 빼앗은 게 뭐였나요? 바로 군사입니다.

 

군대를 해산시켰더니 이 군사들이 정미의병에 합류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규모가 굉장히 커지죠.

 

이렇게 군대가 합류하면서 점점 의병전쟁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을 공격하는 서울 진공 작전도 실시했습니다.

 

이 서울 진공 작전에 합류했던 인물들은 이인영, 허위입니다. 이들이 주장했던 내용 중 하나가 국제법상 교전단체죠.

 

비록 성공은 못하지만 의병들이 계속 전통을 이어갑니다. 어디까지 연결되냐면, 호남 의병까지 이어집니다.

 

 

 

이때 호남 의병이 너무 격렬히 저항하니까 일제가 안 되겠다 싶어서 시행한 작전이 있습니다.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 토벌은 적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죠.

 

고작 의병인데, 국가대 국가 간의 용어를 쓸 정도로 저항이 대단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전국을 쭉 훑으며 내려가고, 결국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만주 쪽으로 넘어가서 경술국치 이후 항일무장투쟁으로 연결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실은 보시면 알겠지만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서 나라가 이미 망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제가 1910년까지 밑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런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다양한 계층이 끝까지 한 몸 불살라 맞서 싸우는 와중에 주권자 고종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그저 나라를 넘긴겁니다.

 

정말 용납할 수가 없죠. 그저 자신의 권력, 생존만이 최종목표인 모습들 속에서 1910년 8월 29일, 결국 식민지가 됩니다.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기 전, 연표를 다시 쭉 훑으며 개항기 당시, 일본이 조선을 작업하고 있던 시기의 경제적 모습, 문화적 모습을 살펴보고 일제강점기로 가보겠습니다.

 

 

연표 흐름도 + 의병 투쟁

 

 

 

    개별 조직 (애국계몽) 의병
1895 을미개혁     을미의병
-을미사변, 단발령
-양반 중심
-고종 해산권고
1904 러일전쟁
[1차 한일협약]
-재정 고문 메가타
-외교 고문 스티븐스


민영환 자결
장지언 시일야방성대곡
오적암살단 (나철,오기호)
보안회, 농광회사 - 황무지 개간권  을사의병
-을사늑약
-최익현, 민종식
-평민의병장 신돌석
1905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외교권 강탈
-통감 정치
  헌정연구회
-입헌군주제 지향
-일진회 비판
-을사늑약 반대
 
1907 헤이그 특사-고종 강제퇴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군대 해산
-차관 정치
장인환, 전명운 스티븐스 암살 대한자강회(06)
-고종퇴위 반대
-보안법 제정 계기

신민회
-대성학교(안창호), 오산학교
-자기회사, 태극서관
-공화정, 국외독립운동기지 (서간도)
정미의병
-해산된 군대 합류
-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작전
1909 [기유약조]
-사법권 강탈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처단   호남의병
-남한대토벌 작전
1910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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