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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개항기 [경제,문화]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이번 글에서는, 개항기의 큼지막한 사건들을 이어놓은 연표를 토대로 경제 관련 키워드를 하나씩 채워나 가볼 겁니다.

 

개항기 연표

 

 

표를 보시면 이미 여러 번 배운 큰 흐름이 머릿속에 쭈욱 지나가죠?

 

그리고 여러분, 시작하기 전에 경제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알려드릴게요.

 

혹시 노다지 라는말 들어보셨나요? 요즘 말로 하면 ‘개꿀’이랑 의미가 약간 비슷하죠.

 

이 노다지란 단어가, NO Touch에서 나왔습니다. 대체 어떻게..?

 

개항기 당시 미국은 골드러시, 즉 금을 찾아 서부를 개척하려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금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죠.

 

그때 미국의 금 채굴 기술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기계를 갖다 대면 금이 쭉쭉 나오죠.

 

이 광경을 처음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겠어요. 와 뭐야~ 하면서 만져본 겁니다.

 

미국 사람들은 그럼 얘기하겠죠. 노터치 노터치! 근데 한국인들은 영어를 알 리가 없죠?

 

노터치 거리니까 '아~ 쟤네들은 이걸 노다지라고 하는구나, 금이 쏟아져 나오는걸 노다지라 하는구나'여기서 나온 겁니다.

 

개항기는 우리나라의 이권이 넘어가는 과정이라 절대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웃픈 일이 있었죠.

 

 

문이 열리고, 우리의 이권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저항했는지 지금부터 시작해 보죠.

 

 

 

 

 

1. 열강의 경제 침탈

 

강화도 조약(76)과 조미수호 통상 조약(82)의 내용이 기억나실까요?

 

강화도 조약에서는 부속조약을 통해서 관세, 항세, 곡식 반출 제한이 설정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최혜국대우도 없었죠.

 

이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 세 항구가 열려 일본인 상인에 대한 개항장 무역이 가능해졌습니다. (내지 무역 X)

 

 

 

그런데 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경제면에서는 이 '82라인'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특히 n 년 이후의 모습으로 옳은 것은? 이런 식으로 자주 묻기 때문에, 명확히 구분하셔야 하죠. 그럼 82년 이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의 영향에 맺어진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방러연미) 강화도 조약의 틀을 흔들어놓습니다.

 

우선 거중 조정 조항이 들어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미국이 개입하겠단 소리입니다.

 

이건 나중의 이야기지만, 일본으로 나라가 넘어가자 미국에 거중 조정을 해달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모른 체하죠.

 

1905년에 맺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있었거든요.  미국은 필리핀을 가져가고, 일본은 조선을 가져간다 이런 조약입니다.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죠.

 

 

그리고 강화도 조약에는 없었던 관세와 최혜국 대우가 조미수호통상 조약부턴 들어갑니다.

 

이전에는 관세 조항이 없다 보니 가내 수공업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조금 나아졌죠.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끝이면 82라인이라는 말을 안 썼겠죠?

 

 

82년에는 임오군란 때 청이 진압해 주면서 내민 영수증,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도 체결됐습니다.

 

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청나라 상인에게 내지 무역을 허락해 주는 건데,이걸 본 일본이 우리도 줘! 하면서 조일통상장정(83)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화도 조약 당시에는 개항장 무역에 한정되었던 일본상인이 82년부터는 청나라 상인과 경쟁하는 모습이 나타나죠.

 

이런 갈등도 청일전쟁 원인 중 하나로 작동했겠죠?

 

 

근데 이청, 일본에 대해 내지 무역을 허용해 주면서 우리 전통 상인들이 힘들어졌습니다.

 

 내지 무역이 불가능했을 땐 전통 상인을 통해서 거래할 수밖에 없으니 보부상, 객주, 여각 같은 상인들이 돈을 좀 만졌겠죠.

 

근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조일통상장정 이후 내지 무역이 가능하게 되면서 전통상인들이 죽어나가는 겁니다.

 

청, 일본의 상인들이 직접 다니면서 거래하니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취하던 구조는 타격이 매우 컸죠.

 

 

정리하자면 강화도 조약 이후는 가내 수공업자가 무너지고(관세 x), 82 조약라인 이후는 전통 상인이 무너집니다.

 

무제한 곡물 유출도 마찬가지로 82 라인에서 제한됩니다.

 

83년에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서 일본인에게 내지 무역을 허용해 줌과 동시에 방곡령 조항을 도입하죠. 

 

82라인 전후로 경제 모습의 차이가 정말 크죠?

 

 

그리고 이 조미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이 있습니다. 바로 보빙사 라고 합니다.

 

앞에서 배운 사절단엔 뭐가 있었죠? 청에 보낸 영선사, 일본에 보낸 수신사와 조사시찰단. 이들과 같은 시기입니다.

 

이 보빙사에 유길준이라는 인물이 있었어요. 앞의 글에서 등장했는데 혹시 기억나실까요?

 

<서유견문>을 쓰고, 영국의 거문도 불법 침략 당시 중립화를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자 어쨌든 이렇게 1882년 띠가 완성되었습니다.

 

뒤로 더 가봅시다. 갑신정변, 위로부터의 개혁 실패했고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농민운동도 실패합니다.

 

갑오. 을미개혁이 시행되고 있는 과정에선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요, 

 

이후에 고종이 결국 어디로 들어간다?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이라고 하죠. 자 여기서 스톱!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서 몸을 사리니, 러시아는 조선에 영수증을 청구하겠죠?

 

그런데 이때 좋은 줄만 알았던 최혜국 대우 조항이 발목을 잡습니다. 

 

앞에서 조. 미 수호통상 조약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최혜국 대우 조항. 이 최혜국 대우를 그 뒤의 모든 조약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남발한 최혜국 대우 조항이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가 언제다? 바로 아관파천 시기다.

 

A 나라에 뭘 하나 주면 다른 B C D 나라에도 상응하는 뭔갈 줘야 하는, 즉 이권침탈이 절정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열강의 이권침탈 약도를 보시면, 뜯긴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국을 오마카세로 즐겨버리는 모습.

 

열강의 이권침탈

 

한눈에 보는 이권 침탈

 

뭘 줬는지 하나씩 봅시다. 먼저 러시아, 러시아가 고종을 보호해 주니 이권을 많이 주겠죠?

 

러시아에는 일단 삼림채벌권을 주고요, 그다음 절영도조차.

 

러시아 배가 동해를 따라 쭉 지나갈 때 부산에 들러서 연료를 채울 수 있는, 즉 석탄을 저장해 두는 저탄소를 요구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잘 아시겠지만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서 절영도조차를 막아내긴 합니다. 한러은행도 막아낼 거예요.

 

어쨌든 이런 것들을 마구마구 남발하고 있는 모습들.

 

 

 

그리고 미국은 뭘 좋아한다? 맨 처음에 말했듯 골드러시, 금을 아주 좋아하죠. 여러 금광을 주고 철도부설권도 줍니다.

 

경인선의 철도부설권을 줬는데, 혼동하지 않으셔야 하는 건 철도'부설권'입니다.  실제로 미국이 짓지는 않아요.

 

결과론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모두 일본이 놓았죠.

 

 

 

그다음에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광산채굴권과 경의선의 철도'부설권'을 넘겨줍니다.

 

경부선의 부설권은 원래 일본이 가지고 있었고요.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경인, 경의선의 부설권을 넘겨받은 거죠.

 

이러면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모두 일본이 놓게 되는 모습이 보이더라.

 

아관파천 때문에 이권침탈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 아주 난리가 낫죠?

 

 

 

앞의 강화도 조약, 조미 수호통상 조약을 포함해서 1880년대에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기예요.

 

외국문물과 우리의 쌀을 교환하는 단계에 그쳤는데 이젠 우리 이권을 가져가는 시기인 겁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시기가 되면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 경영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동시에 일제는 대한시설강령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서서히 식민지로 삼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거죠.

 

이 대한시설강령을 통해 우리나라의 황무지를 개간하겠다 합니다. 이거 어디서 들어봤죠?

 

애국계몽운동에서 이걸 막아내는 모습들이 있잖아요. 보안회, 농광회사가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막아내죠.

 

 

 

 

그다음 단계로 가볼게요.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1905년, 이 시기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완벽하게 우리의 경제적 시스템을 장악하려 합니다.

 

1차 한일협약 때 파견됐던 재정고문  메가타가 이때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합니다.

 

 

우리나라 화폐가 당시에는 백동화였는데, 이를 모두 제일은행권으로 바꿔버리려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백동화 만 원 치를 가져가면 제일은행권 만원으로 바꿔줘야 하잖아요?  문제는 바꿔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짜 같은데? 가치가 없어 보이는데? 이러면서 만원 어치를 가져가곤 천 원을 주거나, 아예 안 주기도 했습니다.

 

 

1:1 등가교환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백동화 화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은행자본이라던지 상업자본은 굉장히 큰 타격을 입겠죠.

 

이 백동화를 만드는 곳이 어디였냐면, 1880년대 근대 시설 중의 하나였던 전환국입니다.

 

이 전환국이 어떻게 될까요? 백동화를 못쓰니까 당연히 폐지되는 거예요.

 

18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근대적 시설들이 하나씩 없어지는 모습들.

 

 

 

그리고 이때 시행된 게 금본위제. 앞에서 갑오개혁 때 은본위제는 보셨죠?

 

이제 메가타의 화폐 정리사업과 함께 백동화를 교체하고, 금이 있는 만큼만 제일은행권을 찍어내는 겁니다.

 

 

다시 한번 봅시다. 강화도 조약으로 문이 열렸어요.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 단계였죠.

 

다음에 아관파천, 우리의 이권을 가져가는 2단계. 3단계는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우리의 토지를 가져가는 단계.

 

화폐 정리 사업을 통해서 우리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려 하는 게 마지막 4단계.

 

어때요? 식민지로 갈 수밖에 없게끔 설계하고 있는 게 정말 무섭지 않나요? 조약을 잘 맺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근데 일제가 백동화를 제일은행권으로 바꿔주려면 돈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1:1 등가 교환이 아니더라도 주긴 해야 하니까요.

 

이걸 어떻게 하냐면, 제일은행권을 새롭게 더 찍어내는 게 아니라 일본에게 빌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식민지 토지를 운영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08년에 세워집니다.

 

여기서 나중에 1910년대에 일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는데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죠.

 

 

+이권 침탈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우리는 또 가만히 있었느냐, 그렇지는 않다는 거죠. 우리도 나름대로 저항을 했습니다.

 

어떤 구국운동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구국 활동

 

일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서 외국 상인들이 들어오고 있는 때로 돌아가봅시다.

 

우리 상인들과 급이 다른 거대 자본이 밀고 들어오니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항하려면 어떡하죠?

 

거대 자본에 맞서려면 개미들이 모여야겠죠. 그래야 자본에 대한 격을 맞출 수 있잖아요. 일종의 주식회사를 만듭니다.

 

1880년대 초반에 나왔던 주식회사들을 모두 상회사 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제한 곡물 유출을 제한하기 위해, 조일통상장정에서 방곡령을 도입했잖아요?

 

근데 도입했다 뿐이지, 일제의 눈치가 보여 잘 시행되지 않습니다. 1889, 1890년에 가서야 시행되기 시작하죠.

 

그것도 순탄히 시행된 게 아닙니다.  방곡령 조항에는  일본 상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한 달 전에 통보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보를 해도 전달 과정에서 고의적 지연을 하는지 전달이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서 오히려 조약위반이라며 배상금을 요구하기도 하죠. 어처구니없죠?

 

하지만 어쨌든 1880년대 후반에 방곡령 시행을 통해서 곡물 주권을 지켜내려는 모습들이 있었다는 점.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우리의 활동은 갑오, 을미개혁 시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갑오개혁 때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했죠. 이를 배경으로 은행들이 설립됩니다. 세금을 돈으로 내면 받을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조선은행, 신한은행, 한선은행 등등 한국은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실 은행설립은 어떤 저항의 의지라기보다는 변화에 대응하려는 모습과 가깝죠?

 

(물론 나중에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을 통해 은행들이 쫄딱 망합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 아관파천 당시 이권침탈이 절정에 이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이권 수호 운동이 전개되죠.

 

이권 수호 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조직이 바로 독립협회입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막아내고, 한러은행을 폐쇄시킵니다.

 

 

 

그리고 상권수호운동. 외국 상인들이 마음껏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 상인들이 못살겠다 하여 전개된 겁니다.

 

이 상권수호운동을 주도했던 조직은 황국중앙총상회라는 조직인데, 시전상인들이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가게 문을 닫는 철시 투쟁의 형태였죠.

그다음 일본의 황무지 개간 요구에 대한 반발. 애국계몽운동에서 봤죠? 복습입니다.

 

보안회, 농광회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일본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막아냅니다.

 

 

뒤로 쭉 가서 을사늑약, 그리고 1907 정미7조약. 이 어수선한 시기 속에서 전개된 운동이 뭐냐면 국채보상운동입니다.

 

국채보상운동

 

서상돈은 우리가 왜 이렇게 외세의 침탈에 흔들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판단해보았습니다.

 

그 판단은 바로 우리가 너무 일본에 기대고 있다는 겁니다. 강제로 빌리게 된 차관이라던지 말입니다.

 

그 빚을 갚아야만 자주적인 주권을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한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합니다.

 

나라의 빛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대구에서부터 운동이 전개되죠. 지역을 잘 봐두셔야 해요.

 

 

왜냐하면 1920년대에도 비슷한 운동이 전개되거든요. 이런 경제 구국형태의 운동이 일제강점기에도 많습니다.

 

나중에 설명드릴 테지만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 평양에서 시작되었죠. 출발지역을 구분하셔야 합니다.

 

 

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언론(특히 대한매일신보)에서 많이 도와줍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금가락지며 반지며 빚을 갚자는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정리하자면,

 

 

 

 

+구국 활동

 

 

앞에서 이런 모습들이 있었기에 IMF때 금 모으기 운동이 잘 진행된 것 이겠죠?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이거입니다. 선례가 없다면 시도하기 쉽지 않아요. 

 

역사 속에서 학습하며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IMF 금 모으기 운동을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 하기도 하죠.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려는 모습들을 살펴봤습니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는 앞의 삼국시대, 고려 때 말한 문화(불탑, 그림)와는 조금 다릅니다.

 

시대가 지남과 함께 문화의 주체가 달라지죠. 예를 들자면 신문?

 

아무튼 문화는 어떤 방법으로 지켜내려 했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3. 문화 수호

 

3-1) 언론

 

먼저 언론부터 볼건데,

조약에 대해 설명할때 82라인으로 나눈 것처럼 문화도 라인을 나눠서 설명해보겠습니다. 

 

경제의 경우, 라인 기준이 외세에 영향을 받았지만, 문화는 주도 세력을 기점으로 나눠 설명하면 더욱 용이합니다.

 

1884. 1894. 1904. 이렇게 3라인을 그리고 신문, 기술, 학교에 대해 알아봅시다.

 

연표 (문화)

 

각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은 다 아시는 단어일겁니다.

 

동도서기는 온건개화파의 정신, 고종의 광무개혁 등.

 

그런데 굳이 온건개화파를 개화기와 구분지어 놓은 이유가 있겠죠? 맞습니다. 1884는 바로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을 뜻합니다.

 

삼일천하로 끝나버리죠. 그럼에도 둘다 개화파여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 그 모습을 1884 라인 앞에 서술할 것이고요.

 

 

 

우리의 최초의 신문은 뭘까요? 박문국에서 발간한 한성순보죠. 80년대에 지어진 근대시설 기억나시죠?

 

이 한성신문은 관보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에서 ~~ 합니다를 알리는 용도죠.

 

이 신문도입에 큰 역할을 한 건 그럼 당시의 주도 세력이겠죠? 개화파들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개화파가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한성순보가 문을 답습니다.

 

뒤를 이어 바로 한성주보가 등장하죠.

한성주보와 한성순보의 차이는 주기입니다.

 

순보란 열흘에 한 번 보도한다. 주보란 일주일에 한번 보도한다. 그럼 일보는 매일매일 나오는 거겠죠?

 

조선일보, 동아일보 이런 거 있잖아요.

 

 

이 한성주보의 역사적 의의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상업광고가 게재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884년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은 실패에 돌아갔지만.

 

여전히 온건개화파가 주도했던 동도서기의 정신에서 한성주보가 나왔다는 걸 기억하시고요.

 

 

그다음 1894년은 갑오개혁 라인입니다. 갑오개혁 이후에 독립신문이 등장하죠.

 

이 독립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우고, 이 시기엔 고종이 아관파천한 것까지 주르륵 떠오르시죠?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집니다. 그리고 여기는 한글 뿐만 아니라 영어의 모습도 보이는 특징이 있죠. 

 

즉 외국에 우리 사정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수반됩니다.

 

 

이제 아관파천 이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잖아요? 그때 등장했던 게 제국신문, 황성신문입니다.

 

앞의 한 글자씩만 따로 말해보시겠어요? 황.제. 맞습니다 이름부터 대한제국 시기임을 보여주죠. 

 

제국신문은 순 한글 신문이어서 서민들이 주로 읽었고, 황성신문은 한자가 많아서 유생들이 주로 보는 신문이었죠.

 

황성신문하면 하나 떠올리셔야죠? 힌트는 을사늑약, 개별적 저항.   바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이를 통해 하나 유추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황성신문이 쭉 이어져서 1904 라인 이후에도 남아있단 사실이죠.

 

을사늑약이 1905년이니까요.

 

 

 

그리고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대한제국이 아주 많이 바뀌기 때문에, 1904라인은 러일전쟁이 되겠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우리가 일본의 영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었죠.

 

일제가 노골적인 식민 지배 시도를 보이자 대한매일신보가 등장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이 모든 신문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냐, 정말 중요합니다

 

일단 양기탁, 신민회 회원이기도 하죠? 그리고 베델이 베델은 외국인입니다. 이름부터 그렇죠? 외국인이다 보니 어떤 일이 벌어졌냐.

 

치외법권때문에 일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당연히 이 대한매일신보는 상당히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싣게 됩니다.

 

의병투쟁에도 호의적인 기사를 싣고 있었죠. 그래서 당시 독자 수가 가장 많은 신문이었습니다.

 

 

베델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도운 신문이죠. 당연히 일본으로서는 눈엣가시였습니다.

 

하지만 베델의 존재때문에 강압적 탄압까진 하지 못하고,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억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하루아침에 시행되는게 아니니 그동안 대한매일신보는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당시의 상황들을 외국에 알리죠.

 

문이 열린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언론이 자생적으로 발달하고 있었음을 살펴봤습니다.

 

 

+신문

 

 

 

 

3-2) 기술

 

사실

한성순보를 발간했었던 박문국도 기술쪽에 들어갈 수 있어요. 문자를 박는 기술이니까요.

 

그리고 함께 등장했던 근대적 기구들을 보면 전환국. 화폐를 찍어내는 곳입니다.

 

이 전환국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게 백동화, 그리고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으로 망하는 미래입니다.

 

 

어쨌든 이 당시 개화기에 전환국이 만들어졌고 다음으로 무기를 만드는 법을 보고 배워라 해서 기기창을 만듭니다.

 

이 기기창의 배경이 뭐다? 청에 파견한 사절단, 영선사가 가져온 무기 정보죠.

 

전환국, 박문국, 기기창은 모두 83년에 만들어졌지만 연도까진 필요 없고 시기적인 덩어리만 넣어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1884년 라인을 넘어갈 때가 중요한데. 개화파와 관련된 게 정말 많습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갑신정변과 관련된 근대적 시설, 뭐가 있을까요? 그렇죠 우정총국.

 

우정총국 오픈 커팅식, 여기서 갑신정변이 시작된 거잖아요?  갑신정변이 터지면서 우정총국도 일시적으로 문을 닫게 되는 모습.

 

 

그다음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나서 설립된 광혜원. 이 광혜원이 갑신정변 이후에 생긴건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당시 갑신정변의 집중적 대상이 온건개화파 민 씨 세력이었잖아요? 다친 민 씨들을 도와주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로 왔던 알렌인데. 갑신정변을 진압한 이후 다시 안정을 찾은 민 씨 세력이 알렌에게 원하는 것이 있냐 물어봅니다.

 

그때 알렌은 병원을 만들어달라 했죠.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 설립의 배경입니다.

 

이 광혜원은 나중에 제중원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근대적 시설들이 1884년 전후로 해서 대거 등장하는 모습. 개화기에 '최초'의 타이틀이 정말 많죠?

 

최초의 병원 광혜원, 최초의 우체국 우정총국, 최초의 화폐발행국 전환국,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등등 골든벨 단골 문제죠.

 

 

 

아무튼 쭉 가서 동도서기 시기로 가보겠습니다. 여전히 개화정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근데 1884 주변에 워낙 큰일이 많았잖아요? 82임오군란, 84갑신정변과 같은 큰일이 터지면 빨리 본국에 알려야 하는데

 

알릴 방법이 없는겁니다. 그래서 전보를 보내기 위해 1885년, 전신이 놓이게 됩니다.

 

또 근대적인 시설이 있다면 전등, 87년에 경복궁으로 맨 처음 들어왔죠.

 

 

이제 1894 갑오개혁 이후, 광무개혁 시기의 모습을 봅시다. 이때 놓였던 기기가 있다면 전화가 놓입니다.

 

전화를 놓으려면 전기가 필요해지죠? 그래서 한성전기회사가 1898년도에 세워집니다.

 

전기회사가 있으니 전차 운행을 할 수 있겠죠. 전차가 다니려면 철도가 필요하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이때 만들어집니다. 

 

 

이 경인선은 이후 등장할 05 경부선, 06 경의선과 큰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목적입니다.

 

1904 러일전쟁이 터지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철도가 바로 경부선, 경의선이죠.

 

경인선은 전쟁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 기억해두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광무개혁 시기에는 대단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동양에서 전차가 다니는 모습들은 정말 몇 나라밖에 불과했거든요.

 

굉장히 빠르게 근대적 시설들을 받아들이는 모습. 기술이었습니다.

 

+기술

 

 

 

 

 

3-3) 교육

 

아까  ‘최초’가 정말 많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원산학사입니다. 왜 원산인지 유추해보시겠어요?

 

1876 강화도 조약으로 처음 문이 열린 세 군데는 부산, 원산, 인천이었습니다.

 

그중 원산 사람들이 근대적 문물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게 원산학사입니다. 

 

최초의 근대적 학교, 원산학사의 독특한 점이 뭐냐면 이 학교는 교육뿐만 아니라 무술도 가르칩니다.

 

마치 고구려의 경당과도 같은 모습이죠? 기억이 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 1884 라인을 넘어서면 이때는 외국선교사들이 학교를 짓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있죠.

 

그리고 쭈욱 가서 1894 라인은 지나가고 1904 러일전쟁 이후, 민족지도자들이 세운 학교가 있어요. 기억나시죠?

 

1904 러일 전쟁 이후, 애국계몽운동이 포커스를 둔 게 언론, 교육, 식산흥업이라고 했잖아요.

 

당시에 민족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세운 학교로 오산학교(이승훈), 대성학교(안창호)가 있죠.

 

여기까지는 개인, 혹은 단체에서 설립한 사립학교고, 공립학교를 찾아보죠. 

 

 

 

앞으로 돌아가서, 공립학교의 최초는 어디일까요? 물론 공립을 포함해도 최초의 근대적 학교는 원산학사가 맞습니다.

 

사립인 원산학사보다 조금 늦게 세워진 동문학이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 동문학은 외국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예요.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그런 학교는 아니었죠. 1884 라인을 넘어가야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1886 육영공원이 등장합니다.

 

말그대로 영재를 육성하는 학교였죠. 이 육영공원은 시험에 꽤 자주 나옵니다. 외국인 헐버트가 있었거든요.

 

직접 외국에서 교사들이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모습. 특히 헐버트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신 분입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세분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서 파견되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1894로 가면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온 거죠? 2차 갑오개혁 때 발표된 겁니다.

 

근대적 학제가 마련되는 시기죠. 그래서 이때부터 소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중학교, 한성중학교도 등장합니다.  교육입국조서 이전과 이후의 학교를 하셔야 합니다.

 

 

+ 교육

 

 

 

이렇게 연도표 상의 신문, 기술, 학교는 모두 했습니다. 그런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마지막 하나가 남았어요.

 

애국계몽운동인데, 1904 러일전쟁을 전후로 본격화되기 때문에 굳이 앞에다 적지 않았습니다.

 

분량상의 배신감을 느낀 분들에게는 사과의 말씀을..

 

 

 

 

 

4. 애국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의 주력인 교육과 언론 그리고 식산흥업은 실력양성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국권피탈기 속 애국계몽운동에서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모습은 국어, 역사, 종교에서 아주 잘 드러나죠.

 

국어 역사 종교. 모두 합쳐도 분량이 소분류 파트 하나와 맞먹기 때문에, 굳이 나누지 않고 진행하겠습니다.

 

 

 

국어부터 살펴보죠. 국어 쪽에서는 이 당시에 우리의 것을 알리려는 노력이 많았습니다.

 

마침 교육입국조서를 통해서 학교들이 많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럼 교과서가 필요할 거 아니에요.

 

이 교과서들을 체계적으로 실을 수 있는 글들과 문장들, 문법들을 체계화시킬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만들어진 게 국문연구소입니다.

 

이 국문연구소는 학부 안에 있던 겁니다. 학부라 하면 2차 갑오개혁 의정부 8아문에서 내각 7부로 바꾼 거 기억나시죠?

 

7부 중에 학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육부죠. 여기서 활약했던 인물은 주시경, 지석영 등이 있습니다.

 

지석영은 나중에 종두법에도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 신소설, 신체시가 나와요. 새로운 소설과 새로운 형식의 시.

 

대표적인 신소설이 있다면 은세계. 금수회의록, 신체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우르르 쾅쾅 등등.

 

 

 

그리고 역사쪽에서는 지금이 국권피탈기니까, 잃어버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역사를 지켜내야했습니다.

 

우리의 영웅들을 보여주는 위인전, 그리고 각국 여러 나라의 흥망사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죠.

 

특히 신채호가 이런 것들을 많이 썼습니다. 위인전, 독사신론을 썼죠.

 

독사신론을 통해 이후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사학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민족주의 사학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가가 바로 신채호라고 볼 수 있어요. 조금 기억해 두실 필요가 있겠죠?

 

 

 

마지막으로 종교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여러 종교가 있는데 우선 천도교. 천도교가 어디에서 이름을 바꿨을까요? 천주교 아니고 동학입니다.

 

천도교의 기관지라면 만세보가 있죠.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대종교. 대종교란 단군을 믿는 종교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나철이 있죠.

 

오적암살단을 만든 그 나철맞습니다. 바로 저번 글에서 했잖아요?

 

 

그다음 유교,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로 활약했던 박은식이 대표적 인물이죠.

 

이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이라는 게 있어요. 다른 종교들을 열심히 찾아가면서 포교활동을 하는데 유교는 뭘 하고 있느냐.

 

이런 얘기를 한 겁니다. 뒷짐 지고, 어깨에 힘만 들어간 옛 유교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 지조 높은 유교가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불교. 한용운이 중심이 되어서 마찬가지로 <불교유신론>이 나옵니다. 유교랑 비슷한 거예요.

 

하나만 더 본다면 가장 늦게 포교가 시작된 천주교.

 

늦은덴 이유가 있습니다. 병인양요때 프랑스와 싸운 이후에 수교가 좀 늦게 이뤄지거든요.

 

그래서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한 이후 1866년, 이때부터 포교가 가능해졌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을 끝으로 개항기에 대한 모든걸 다방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보니깐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의 대부분이 개항기에 형성이 되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걸 알 수 있죠?

 

확실히 개항 이전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자, 다음 글부터는 뭘 배워야 할까요?

 

가슴 아프지만 식민지가 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배워볼 겁니다.

 

일제강점기 글을 통해 마음 속 깊이 잠들어있던 애국심이 꿈틀거리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애국계몽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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