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1920년대 저항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1920년대는 문화통치 시기입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통치방식을 바꾸다 보니 살짝 틈이 열려있죠.

 

헌병 - 보통 경찰의 변화, 태형의 폐지 등 기만적이긴해도 열려있는 공간이 생긴겁니다.

 

이 열려있는 공간을 놓치지 않고 아주 다양한 저항 운동의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다양한 저항이 전개된다는 것이 1920년 이후의 특징이죠.

 

 

 

 

 

1. 실력양성운동

 

실력양성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입니다.

 

그럼 이 실력양성운동의 핵심은 뭘까요? 애국계몽운동의 교육, 언론, 식산흥업입니다.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됨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는 사회주의 진영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죠? 무단통치로 아예 압박하고 있었으니..

 

이 사회주의 탄압이 1920년대부터 줄어들어, 슬금슬금 등장하는겁니다.  

 

1920년대 후반에 가면 이 민족주의 진영와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는 모습으로 연결될겁니다, 1920년대 저항의 큰 흐름입니다.

 

 

 

민족주의 진영의 운동, 실력양성운동을 봅시다.

 

첫째로 물산장려운동. 물산장려운동의 배경은 이미 일제 정책 설명과 함께 알려드렸습니다.

 

1920년대가 되면서 회사령이 폐지됨과 함께 일본의 거대자본이 관세없이 물밀 듯 들어와서 우리 민족자본은 경쟁이 안되는 모습.

 

그 위기를 애국심에 호소하는 겁니다. 우리것 써주세요~하는거죠. 이 물산장려운동은 평양에서 시작합니다. 

 

물산장려운동 포스터

 

대구에서 시작한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과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

 

 

근데 이 물산장려운동이 먹히는 겁니다. 우리 물건들을 많이 사게 되면서 수요>공급의 상황 속에 가격이 올라가죠.

 

이렇게 되면서 이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회주의 진영이죠.

 

 

 

사회주의가 뭐죠? 자본가 타도입니다. 자본가를 타도하고 농민,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타도 대상안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자본가가 있기 때문에 서로 손잡기 어려운 구조죠.

 

 

 

사회주의 세력이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한 내용들을 쭉 보면,

 

도대체 이 물산장려운동이 누구를 위한 운동이냐. 가난한 농민들은 애초부터 물산장려 세력이었다. 그저 돈이 없었을뿐.

 

그저 싼 국산품 애용자였다. 그런데 이 물산장려운동을 하면서 그 국산품 값이 올라가버렸다. 자본가를 위한 운동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서 물산장려운동은 크게 성행하지는 못하는 상태로 끝나게 됩니다.

 

 

 

그다음 이상재가 주도한 민립대학 설립 운동

 

교육과 관련된 1920년대의 일제 정책, 2차 교육령이 기억나시나요?

 

우리 한국인의 학제를 일본인과 동일시 해준 2차 교육령이 발효되자, 우리가 운영하는 대학을 세워보자 하며 출발합니다.

 

하지만 기만책이라는 말과 걸맞게 일제의 방해 속에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죠.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점.

 

다음 문맹퇴치운동. 문맹 퇴치를 위해 조선일보(20년대에 열린 신문)가 주도하여 문자 보급 운동을 했습니다. 

 

 

정말 교육, 언론, 식산흥업 모두 그대로죠? 민족주의 진영에서 이런 실력양성 운동을 진행할 때, 사회주의 진영은 뭘 했을까요?

 

사회주의 진영의 활동을 두 글자로 말한다면 쟁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파업이죠. 자본가를 타도하기 위한 쟁의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자본가는 일제를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들이었으니까요. 이 사회주의 세력이 너무나 흥행하여 

 

억압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도 만들잖아요? 이들 사회주의 진영이 암태도 소작쟁의. 원산총파업(노동쟁의)를 주도하죠.

 

 

 

특히 노동쟁의와 관련해서는 기억하실게 있습니다.

 

조손노동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조직들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이 단결의 힘을 눈치챈 사람들은 뭉치면 산다!를 실현합니다.

 

원산총파업이 이에 해당하죠. 1929 원산총파업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게 실현된 사건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국제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을 지지해주는 편지, 성금같은걸 거둬 보내주곤 했거든요.

 

즉 원산총파업에선 노동자들의 국제연대가 드러나는겁니다.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노동자라면 모두 하나라는거죠.

 

사회주의의 입장과 들어맞죠? 노동자로서 단결하여 세상의 자본가와 맞서싸우는 형태입니다.

 

 

 

 

 

이렇게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살펴봤는데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일단 민족주의 진영이 주장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위 3개)

 

그러다보니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자치론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나뉘게 됩니다.

 

자치론자는 일제를 타도하기 어려우니 일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투표권을 얻는다던지 자치를 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는 일제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다,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자 

 

 

즉 자치론자는 민족반역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 이광수, 결국 광복이 되고 난 뒤 반민특위에 끌려가죠. 그때 그가 말하길, 일본이 망할지 몰랐다. 

 

..

 

그는 조선이 낳은 천재였습니다. 정말 똑똑했죠.

 

우리나라 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무정,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창기 등

 

정말 많은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독립운동가가 변절했을 때 얼마나 더 무서운지 이광수를 통해 알 수있죠.

 

 

어쨌든 실력양성운동에 큰 진전이 보이지 않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론자/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나뉘게 됩니다.

 

사회주의 진영도 이때 변화합니다. 당시 굉장한 쟁의활동을 하고 있으니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이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드니 사회주의세력은 뭔가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게 됩니다.

 

두 세력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1920년대 후반에 손을 잡게 되는 모습.  이게 바로 좌우 합작입니다. (좌 : 사회주의, 우 : 민족주의)

 

 

손을 잡은 두 세력은 좌우합작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조선 민흥회를 만들어봅니다. 근데 나쁘지 않네요?

 

그러자 사회주의 진영에서 정우회 선언을 합니다. '우린 민족주의 진영과 손을 잡고 활동하겠다'

 

본격적인 좌우합작이 성사되는거죠. 그 단체가 신간회입니다.

 

구한말의 신민회와는 구분을 해야겠죠. 1927 신간회는 너무너무 중요한 단체입니다.

 

구한말 신민회는 애국계몽 운동단체, 1927 신간회는 좌우합작,즉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물.

 

 

 

일단 신간회를 이끌던 사람은 이상재입니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의 주도자이기도 하죠.

 

비밀결사 단체였던 신민회와 달리 신간회는 공개단체여서 전국적으로 지회를 결성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직 중에서 최대 규모의 조직이죠. 좌우가 합쳐진조직이니까요.

 

그리고 신간회 자매단체로써 여성들의 근우회. 나중에 여성운동에 서술해드리겠습니다.

 

 

근데 이 신간회는 얼마안가 해소됩니다. 신간회는 그동안 노동쟁의, 소작쟁의 등등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후원하고, 진상조사단을 파견 및 민중대회를 열려고 한 사실로 덜미가 잡히게 됩니다.

 

이 행위로 일본에 찍히고 압박이 들어오다가 결국 1931, 신간회가 해소되는거죠.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해소입니다. 와해도 아니고 해소가 뭐죠? 조금 생소합니다.

 

쉽게 말하면 해체되었다는 얘기인데. 왜 해체라고 안했을까요?

 

해소는 완전히 없어지는게 아니라 더 나은 조직으로 등장하기 위해 잠시 해산한다는 의미입니다.

 

발전적 조직으로의 준비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실제로 더 나은 조직이 만들어졌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걸로 끝이었어요. 그렇지만 해소를 씁니다. 의도를 반영한 단어선택이죠.

 

그래서 해소라는 단어가 보이시면 신간회를 떠올리셔도 무방합니다.

 

 

 

 

국내에선 정우회 선언, 국외에선 북경촉성회(안창호)가 유일당의 필요성을 외치며 만든 신간회는 의의를 가집니다.

 

이념이 다른 사람끼리 서로 나뉘어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목표인 일제 타도를 위해 손을 잡자는게 이 시기의 화두가 되었고

 

이것이 30년대 40년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간회에서는 일제강점기에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2. 대중 운동

 

 

1920년대의 특징이라고 했죠? 민족, 사회주의 운동 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활동들이 나타납니다. 

 

 

 

2-1) 학생 운동

 

먼저 6.10 만세운동. 1926년에 전개되었던 운동인데, 계기가 뭘까요?

 

앞의 3.1 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고종의 아들, 순종의 죽음이 계기로 작동한게 바로 6.10 입니다.

 

순종의 인산일을 활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이미 3.1운동에서 크게 데인 일제가 완벽히 대응하여 전국적 확산은 실패합니다.

 

 

그다음 3년뒤. 1929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납니다.

 

광주와 나주를 오고 가는 통합열차 내에서 일본 학생과조선 학생의 싸움이 발생합니다.

 

나주역에서 내려선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이죠.

 

경찰이 출동해서 이들을 잡아가는데 조선학생들만 엄격하게 조치하는겁니다.

 

 

 

이 당시를 살고 있었던 학생들의 가슴에 맺혔던건 차별이었습니다.

 

식민지 학생으로 살아야 될 때의 차별, 이 차별에 대한 억한 심정이 이 사건을 계기로 빵 터져버린겁니다.

 

이러면서 동맹휴학이 전국적으로 확솬됩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민족운동으로 확산이 되었죠.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만 해’와 같은 말은 없어져야 합니다. 이건 굉장히 비역사적인 발언이죠.

 

일제강점기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그 역사의 변곡점이 되었던 주체를 들여다보면 어른이 아니라 학생이었거든요.

 

 

3.1운동도 마찬가집니다.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은 학생이었죠.

 

너무나 큰 저항에 일제가 3월1일, 당시 휴교령을 내립니다.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요.

 

그러자 학생들은 각자의 지방으로 내려가서 서울에서 벌어진 3.1운동 소식들을 일파만파 전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하죠. 즉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이 학생들입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던 일제에 맞서, 어린 학생들이 보인 모습들은 정말 마음 한 켠을 꿈틀거리게 만듭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또한 학생이 주체였죠.

 

현대사의 4.19 혁명,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난 4.19 혁명 또한 앞장섰떤 세력들이 학생들입니다.

 

심지어 그때는 초등학생들까지도 참여하죠. 우리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세력들은 학생이라는 거인이었습니다.

 

 

 

돌아가서, 6.10 만세 운동을 할 때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는 했지만 민족주의 세력들이 도움을 줍니다.

 

사실은 사회주의 ,민족주의 진영이 손을 잡았던 모습이 6.10 운동부터 얼핏 보였던거죠. (신간회 결성 이전입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앞에서 얘기했던 신간회 결성 배경 속에 녹아들어가는거구나~ 하시면 됩니다.

 

 

신간회 결성의 배경으로만 제가 벌써 4가지를 알려드렸죠? 조선 민흥회, 정우회 선언, 북경촉성회, 6.10만세 운동까지.

 

이렇게 결성된 신간회가 광주학생항일운동때 진상조사단을 파견해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사실까지, 선후관계를 잘 파악하시면 되겠습니다.

 

 

6 10 – 신간회 – 광주학생 후원. 이게 시험에 굉장히 자주 나오는 문제입니다.

 

 

 

 

2-2) 청년 + 소년 + 여성 운동

 

1924 조선 청년 총동맹. 이것만 알아두시면 청년 관련은 더 볼 게 없습니다.

 

오히려 소년 분량이 많은데, 당시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소년들에겐 인권이란게 없었습니다.

 

어린이라는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죠.

 

그런 소년들을 더 이상 폭력으로 대하면 안된다며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보호를 주도했던게 천도교 였습니다.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 신도였죠. 이때 나온 잡지 중의 하나가 <어린이>입니다.  

 

 

 

그리고 여성운동, 신민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가 주도하여 이끌었습니다.

 

근우회 포스터

 

마지막은 형평운동, 이름만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뭔가 형평성.. 이 생각나시죠?

 

맞습니다. 형은 백정들이 사용하는 저울이었습니다. 고기를 썰고, 고기의 무게를 재는 역할이었죠. 평은 평등이구요.

 

 

즉,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겁니다.  1894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백정에 대한 차별은 있었거든요.

 

사회적 의식때문이었죠. 이 형평운동은 진주에서 출발합니다. 진주에서 출발했던게 하나 더있죠?

 

조선 후기, 임술농민봉기도 진주였죠. 그래서 전주화약을 체결했었고요.

 

또 임진왜란때 적장을 촉성로에서 데리고 떨어진 논개, 그것도 진주잖아요? 역사적 중첩성이 또 나타나네요.

 

 

 

이렇게 다양한 운동들이 많은 1920년대의 모습. 문화통치에 열려진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가 나타납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게 만들었던 1920년대의 의열투쟁. 의열단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대중운동
[학생]
6.10 항일 운동 (26) - 순종인산일
광주학생항일운동 (29) - 동맹휴학,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전국확산x

[청년]
조선 청년 총동맹 (24)

[소년]
천도교 방정환 <어린이>

[여성]
근우회 (좌.우합작, 신간회 자매단체)
형평운동 (백정 차별),진주 시작

 

 

 

 

 

3. 의열 투쟁

 

정말 위험하지만, 청년이라면 조국을 위해 누구나 다 들어가고 싶어했던, 1920년대 청춘들의 bts라고도 볼 수 있는 의열단.

 

당시엔 너무나도 선망의 대상이었거든요. 이 의열단은 1919년에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조선혁명선언을 활동의 지침서로 삼았죠. 이 조선 혁명 선언서를 썻던 사람은 신채호

 

<독사신론>의 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창조파. 그 신채호 맞습니다.

 

 

 

이 조선혁명서에서는 폭력에 의해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지침이 있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절대적 명제로 쓰면 안됩니다. 일반적으론 나쁘지만 상대적 개념이죠.

 

절대적 개념이 되어버리는 순간 일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모두 나쁜사람이 되는겁니다.

 

자신의 주권을 빼앗기고, 자신의 자유를 빼앗겼을 때 사용되었던 폭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죠.

 

 

 

이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인데, 먼저 단원들부터 살펴봅시다.

 

사실 단원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는건 매우 지엽적이라 자격증 취지와는 맞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꼭 소개를 드리고싶네요.

 

 

 

먼저 김익상, 이분 정말 대단합니다.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도 무사했어요. 총독부가 2층인데, 거기서 폭탄이 꽝! 터지니까 아래의 헌병들이 놀라서 달려오겠죠?

 

이분은 여유롭게 내려가며, 달려가는 헌병들에게 '워워워, 2층은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허허.. '하고 사라집니다.

 

그러고는 저쪽 상하이에서 또 폭탄을 들고 등장합니다. 강심장의 소유자죠.

 

 

 

김상옥. 이분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분이죠.

 

이분은 조선 최고의 총잡이라고도 불립니다. 김상옥 단 1명을 잡기 위해서

 

일본 경찰 1000명이 동원됩니다. 1 vs 1000의 시가전을 벌였던 인물이죠. 전설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죠.

 

 

끝이 아니에요. 김지섭. 이분은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집니다.

 

 

 

근데 혹시, 수능 한국사가 선택과목이자 상대평가였던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이때 지엽적 문제의 대표적 주자가 의열단원을 고르는 문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지섭 이분은 당시 한국사 교과서에는 날개에도 나올까말까 하는, 그저 일본 쪽 의열단 활동에서 조그맣게 써지는 이름.

 

딱 그정도의 비중이었습니다.

 

 

 

저는 절대평가 세대이긴 하지만 수능풀이는 어릴적부터 해오던 것이라 해당 문제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 심화 문제에서도 한두문제 나올까말까한 선지였죠.

 

게다가 당시 한국사는, 서울대만이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기 때문에 서울대를 원하는 학생들만 응시하는 과목이었습니다.

 

그때 김지섭을 찾는 의열단 문제가 나와서 정답률이 10%채 되지 않았죠.

 

 

 

이 문제를 하나 틀리면 당시에는 서울대를 가지 못했습니다. 1등급이 안나오거든요.

 

그래서 의열단원 김지섭, 이분은 용맹히 독립을 위해 싸웠던 운동가이지만  정말 많은 욕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1932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날 당시, 일본은 조센징을 타켓으로 잡습니다.

 

조센징이 불을 지르고 있다! 조센징 여학생의 치마에는 폭탄이 있다!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등.

 

말도 안되는 소릴하며 백두대낮에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러면서 관동대지진때 대낮에 학살됐던 조선인들만 6천 명이 넘어갑니다.

 

그 모습을 본 김지섭. 이 일에 항의를 하기 위해 일본황국에 폭탄을 투척한겁니다.

 

결국 이 폭탄투척을 마지막으로 김지섭이라는 인물은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자신의 청춘을 그 폭탄과 바꾸면서 저항을 했던 분이죠.

 

 

저는 너무 지엽적인 출제와 함께, 김지섭이라는 이름이 한국사 1등급의 벽으로 거론되며 비난 받도록한 교육부가 조금 미울뿐입니다.

 

 

 

어쨌든 이 의열단원들은 일본인들에게 정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김원봉한테 붙었던 현상금이 얼만지 아세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최고로 높은 현상금이 붙은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320억. 어마어마하죠?

 

이 김원봉이 의열단 투쟁을 이끌다가 고민이 됐었던게 있어요.

 

한명 한명을 죽여나가는 모습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의미가 있을까? 하며 개별적 투쟁이 아니라 조직화 투쟁으로 변화하죠.

 

 

 

그래서 1925년부터 의열단원들이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중국의 육군사관학교라고 보시면 돼요.

 

여기에 김원봉이 연결되면서 중국 고위 인사들, 장계석을 포함한 고위인사들과 인맥이 연결되게됩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김원봉을 많이 후원해주죠. 이 얘기는 1930년대 저항에서 자세히 해드리겠습니다.

 

1920년대 일본의 간담을 서늘게 했던 의열단까지 알아봤습니다.

 

의열단 활동

 

 

의열투쟁
의열단(19)
<조선혁명선언> by신채호
김원봉
김익상 (총독부)
김상옥 (종로경찰서)
나석수 (동양척식, 식산)
김지섭 (황국)

개인적 저항 외 조직적 저항 필요성을 느낌


1925 황푸군관학교 대거 입교 : 중국과의 연 시작



 

 

 

 

4. 민족문화수호운동

 

이 민족문화수호운동은 1910년대에도 보셨던겁니다. 국어라던지 신문이라던지 보셨잖아요? 그 모습이 계속 나타나는겁니다.

 

우선 국어,

우리말 지켜야죠. 1920년, 문화통치를 통해 열린 틈으로 조선어연구회가 만들어집니다.

 

조선어연구회는 처음으로 가갸날을 제정합니다. 지금 우리의 한글날이죠? 고마운 조직입니다.

 

그다음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합니다. 이 조선어연구회가 나중에 1930년대에 가면 조선어학회가 됩니다.

 

 

 

역사볼까요? 역사하면 신채호, 박은식 선생이 특히 1920년대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정선과 낭가 사상을 주장하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조선사제일대사건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상고사>까지, 1931년에 나오는 책이긴 하지만 신채호 얘기가 나온 김에 같이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 2대 대통령이라고 했던 박은식 선생. 이분은 특히나 혼을 강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역사를 잊지 않고, 혼을 가지고 있으면 다시 되찾을수있다고 주장했죠.

 

박은식 선생의 저서를 보자면 1910년에 만들어진 <한국통사> 여기서 통은 아플 통입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운동이 피로 쓴 역사라고 하죠. 맞는 말 입니다.

 

국어나 역사나 나름대로 우리 정체성을 찾으려는 모습.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도 (사실 1910년대 글에서 얼핏 설명드렸죠) 바로 1926년에 나옵니다.

 

 

1910년대와 달리 국내의 독립활동이 왕성해지죠? 이제 국외도 볼건데, 1910년 국외에선 뭘 했었나요?

 

독립운동기지들을 건설했었습니다. 그럼 이젠 무슨 차례인지 짐작 가시죠?

 

바로 그 독립운동기지에서 배출한 독립투사들의 항일무장투쟁이 1920년, 시작되는 겁니다.

 

 

민족문화수호운동
[국어]
조선어연구회 : 가갸날 제정, <한글> 창간

[역사]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박은식 : 국혼 강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영화]
나운규 '아리랑'

 

 

5. 국외 항일무장투쟁

 

 

 

그 첫 번째 총성은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 봉오동 전투를 이끈 인물은 홍범도 장군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을 중심으로 전투하죠. (북간도지역 기억나시죠?)

 

 

여기서 승리를 거두자 일본이 이 지역의 독립군들을 몰아내야겠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려는데, 아시다시피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지역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즉 침략에 명분이 필요한겁니다. 마치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관이 공격받았다며 제물포조약을 맺고 일본군을 데려온 것처럼요.

 

이번에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바로 훈춘이라는 곳에서 훈춘사건을 조작합니다. 이 지역의 마적단을 매수해요.

 

 

 

돈을 주며 일본의 영사관을 좀 적당히 공격하라하죠. 그 과정 속에서 일본인이 죽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야, 우리 일본 영사관 죽었어. 우리 일본 영사관 지켜야해' 라며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넘어가버린거죠.

 

그러자 일본군의 대규모 군대가 넘어왔다는 소식에 독립군들이 백두산 근처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이 백두산 근처에서 전개된 전투를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이 청산리 전투는 대첩이라고도 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봉오동 전투에 활약했던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까지 함께 싸웠는데, 대박 사건이 벌어지죠.

 

 

군대들이 모였다지만 무기도 열악하고 인원도 적은 우리 부대가 이길 방법은 단 하나, 게릴라라고 판단했습니다.

 

백두산의 지형을 이용해 치고 빠지며 작은 승리들을 챙기자 일본군은 전략을 바꿉니다.

 

산의 위에서, 그리고 산의 아래에서 함께 협공하는 전략으로요. 그런데 이때 김좌진 장군이 기가 막히는 지휘를 합니다.

 

 

그들이 위아래에서 협공하도록 한뒤, 엄청난 안개를 이용해서 중간에 쏙 빠져버리죠.

 

일본군의 화력은 정말 강력해서, 그 강력한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하니 피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승을 거두게 되죠.

 

 

 

패배의 쓴맛을 본 일제는 아예 이 지역을 초토화시키겠다며 간도 참변을 일으킵니다. (경신참변이라고도 합니다)

 

간도 지역을 일본이 그냥 다 불태워버립니다. 이 과정 속에서 명동학교도 불타죠.

 

마을이든 사람이든 다 태워버리니 독립군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간도(경신)참변

 

그래서 위쪽의 한흥동으로 독립군들이 이동하죠. 여기서 정비를 하며 만든 분대가 대한독립군단입니다.

 

 

이 대한독립군단에는 김좌진, 홍범도 모두가 들어가있었습니다. 이 한흥동에서 정비 후 러시아령으로 이동합나디.

 

그런데 러시아 쪽으로 들어올 때 러시아가 제의합니다. 무장해제를 하고, 러시아군에 편입을 해서 싸우라고 말이죠.

 

 

이를 들은 독립군은 그럴순 없다며 러시아군과 총격전을 벌입니다. 이때 정말 많은 피해를 입었죠.

 

이 사건을 1921 자유시 참변이라고 합니다. 이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겠구나 싶은 판단에 다시 내려옵니다.

 

 

쭉 내려와서 3부를 결성하죠. (지도와 함께 보세요) 창의부 , 정의부, 신민부로 3부를 결성하여 일종의 정부로 활동하는 모습.

 

실제로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일본으로서는 황당한겁니다. 밀어냈는데 또 들어온거죠?

 

이번에도 역시 가만두지 않으려고 3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중국 군벌과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협정이 바로 미쓰야 협정이죠.

 

 

1925년에 체결된 미쓰야 협정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들을 중국인들이 잡아서 일본에 넘기면 돈을 주겠다는 거에요.

 

우린 그럼 일본눈 뿐만 아니라 중국인 눈도 피해야하는 거죠.

 

이렇게 되니 위기의식을 느끼고, 미쓰야 협정을 타개하기 위해서 3부 통합 운동을 전개합니다.

 

굳이 나뉘어있지 말고 뭉쳐서 힘을 합치자. 이겁니다. 그 결과 3부는 북만주의 혁신의회, 남만주의 국민부로 통합됩니다. 

 

독립군 과정

 

 

 

이 혁신의회와 국민부는 잘 기억하셔야해요.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 연결되거든요. 각각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으로 연결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독립군의 이동거리가 수 천KM를 넘습니다.

 

뭘 타고갔을까요? 걸어갔죠. 낮에 갔을까요? 밤에 갔죠. 평지로 갔을까요? 산을 타며 갔죠.

 

그렇게 힘들게 이동한 경로들이 모여 저 방대한 선을 이루고 있는겁니다.

 

굉장히 많은 순서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저 외워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920년대 저항의 모습이었습니다.

 

 

 

'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복 ~ 6.25 전쟁  (0) 2023.07.30
1930 -1945 저항  (0) 2023.07.29
1910년대의 저항 + 대한민국 임시 정부  (1) 2023.07.28
일제강점기  (0) 2023.07.28
개항기 [경제,문화]  (1) 2023.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