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이번에는 난, 특히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바뀌게 되는 후기의 조직과 외교 관계를 볼 겁니다.
이미 앞에서 배운 내용과 상당히 겹치니까 복습하는 생각으로 편히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배웠던 내용 먼저 간략히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가 권력이 강력해졌다 했습니다.
비변사는 세종 때 왜에게 열어준 삼포에서, 삼포로는 부족하다며 왜들이 16세기 중종때 일으킨 삼포왜란때문에 만들어진거죠.
중종의 삼포왜란을 거치고, 명종 때엔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비변사를 상설기구화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 그래도 이때 권력이 커졌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아예 비변사가 갑이 되는 모습.
이러다 보니 기존에 운영되고 있었던 의정부와 6조 체제의 기능과 권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죠.
이 비변사의 권력이 절정에 오르게 되는 시기는 세도정치입니다.
세도정치 자체도 왕권이 약한걸 보여주는데, 비변사의 절대권력까지 왕권이 너무나 추락한 모습.
때문에 흥선대원군 때 결국 비변사가 폐지되죠.
이렇게 전기로부터 이어지는 군사조직의 흐름, 익혀두시고 본격적으로 군사조직 시작하겠습니다.
1. 군사 조직
조선 전기의 중앙군은 5위 체제, 그리고 지방의 영진군이라 했었죠. 5위는 의무병이라고 말씀드렸고요.
조선은 임진왜란까지 200년 간 큰 외침이 없다 보니 군대에서 훈련이 아니라 힘든 중노동에 투입해 버립니다.
그래서 군역은 줄어들고, 군대를 안가는 요역화 현상이 심해지죠. 남이 대신 가주는 대립, 그리고 포를 내는 방군수포 기억나시죠?
이러니까 일본이 쳐들어올 때 속수무책으로 밀리죠.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만들고 5 군영 체제로 변경합니다.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수어청, 총융청, 어영청, 금위영까지 5개 쪼르륵 만들어집니다.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게 훈련도감이죠. 훈련도감은 삼수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했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의 위력을 깨닫고 만든 부대인 조총을 쏘는 포수 그리고 활을 쏘는 사수, 창을 쓰는 창수가 있죠.
근데 구성의 변경도 있었지만, 하나 더 포인트가 있습니다. 앞의 5위 때는 의무병이었잖아요?
그렇다 보니 군역을 포나, 대립으로 대체하는 자들이 늘어났죠. 그래서 정부는 생각합니다.
애초에 돈을 받는 직업군인으로 운영하면 군력이 줄어들 일이 없겠구나. 그리하여 모병제를 실시합니다.
돈을 받기 위해 자원해서 군대를 가죠. 이들 직업군인은 급료를 받고 항상 주둔하고 있는 상비군임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훈련도감외 잡다한 ~청들은 모두 호란을 전후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방군도 봐야겠죠? 영진군이 속오군 체제로 바뀝니다.
영진군은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양인들이 갔다면, 속오군은 양반과 천민 모두가 갑니다. 일종의 예비군 형태죠.
그리고 영진군 시절에는 진관체제의 수비를 펼쳤습니다.
기억나시죠? 각자의 지역은 각자가 막는, 그리고 뚫리면 다음 지역에서 막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수비 체제는 속오군 개편과 함께 제승방략 체제로 바뀝니다.
특이한 것은, 진관에서 제승방략으로 바꾸고, 임진왜란을 거쳐 다시 진관체제로 바꾸었습니다.
제승방략 체제란 전쟁이 나면 주변에서 한 곳에 다 모이고, 중앙에서 그 지역에 장수가 파견되어 함께 싸우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장수가 중앙에서 오기도 전에 다 밀리는 겁니다. 게다가 다 모여있으니 한 곳이 뚫리면 후방이 없죠.
이 단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전투가 왜란 당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죠.
충주의 탄금대 전투가 뚫리자 바로 일본이 한양까지 진격했습니다. 때문에 이후 다시 진관체제로 바꾸게 되는겁니다.
정리하자면 조선 후기의 중앙군은 5 군영, 지방군은 속오군, 비변사 권력의 강화입니다. 이제 주변 나라와의 관계를 봅시다.
2. 외교
우선 여진족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세운 후금이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는 얌전하다가,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니 쳐들어왔다했죠
광해군은 특히 명의원요청에 군을 보내지만, 강홍립 장군에게 눈치를 보라 명하고 결국 강홍립 장군은 후금에 투항하는 모습.
앞에서 했지만 복습입니다. 명과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에 의해 광해군이 쫓겨나는게 인조반정이죠.
인조와 함께 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이 이때부터 집권합니다. 이 내용 벌써 3번째라 지겨울지도 모르겠네요.
광해군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정으로 왕위를 빼앗은 선조는 당연히 중립외교를 하지 않겠죠?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시행합니다.
이에 후금의 첫 번째 침입이 정묘호란, 정묘호란 때 활약했던 대표적 인물이 있다면 용골산성에서 활약했던 정봉수가 있겠네요.
첫 번째 전투에서는 이렇게 의병들이 활약해줘서 후금에게 먹히지 않고, 형제관계를 협약한 뒤 후금이 물러나죠.
하지만 선조는 이에 불구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버리지 않아 또 후금이 쳐들어옵니다. 그게 병자호란이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그 안에서 의견 갈등을 보인 최명길과 김상언 기억나시나요?
결국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선조는 삼전도의 굴욕, 삼배구고두례를 당하죠.
이때 굴욕적 항복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효종)이 다음 왕으로 오릅니다.
같이 잡혀갔던 선조의 첫째 아들 소현 세자는 청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다가 2달 만에 죽었다고 했죠?
아무튼 둘째로써 왕위에 오른 효종.
송시열과 윤휴는 효종에게 아버지를 무릎 꿇렸던 그 오랑캐들을 가만둘 수 없다며 북벌론을 주장합니다.
재미있는 게 뭐냐면, 여기서 과연 송시열과 윤휴는 북벌론을 정말 청에 대한 복수심에 주장한 걸까요?
정치인들에겐 항상 명분이 있습니다. 청한테 깨진 와중에 청을 다시 치자니 당연히 군비를 강화해야겠죠.
그들의 속내를 티 내지 않으면서 돌격 앞으로~ 이러고 있는 겁니다.
군비를 강화해서 청나라를 치자는 의도보다는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싶은 의도가 더 크죠.
즉 북벌을 명분으로 세력 강화를 이루려는 겁니다.
A: 진짜로 청나라를 치려고 준비하던걸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당시 북벌론이 거론될 때, 청나라는 조선에게 러시아를 치기 위해 파병을 요청합니다.
조선에겐 최적의 타이밍이죠. 러시아와 청이 싸울 때 같이 청을 잡으면 수월하니까요.
하지만 조선은 청에게 군을 보내줍니다. 이게 나선정벌입니다. 조총부대를 보내주죠.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위선적 모습..
심지어는 우리가 총을 잘 쏴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즉 북벌론은 세력 강화의 명분일 뿐인 게 확실한 거죠.
슬프게도 정치적 움직임에 이용된 군인들은 아무 환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선정벌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개선장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습니다.
‘오랑캐를 도운 군대’ 리서 말입니다.
이래서 정치적 구호에는 우리가 예민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겉보기엔 달아 보여도 그 속내는 알 수가 없죠.
아무튼 이렇게 인조와 효종을 거치면서 숙종의 시대로 넘어오는데, 바로 전 글에서 배웠죠?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을 두고 일어난 현종 때의 두 차례 예송논쟁, 그리고 남인이 이기지만 숙종의 환국 끝내 남인은 축출되는 모습.
이 숙종은 역사 바로 세우기 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특히 청과의 영토 분쟁을 해결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백두산정계비를 세우죠
TMI) 숙종 때 평범한 어부였던 안용복이 왜놈들이 하도 독도에서 설치니까 일본국왕에게 직접 가서 독도는 한국 땅임을 인증받아옵니다. 현재의 독도 분쟁에서도 아주 중요한 증명사료로 쓰이고 있죠.
그리고 정조 때 이르러서야 어리석은 친명배금 정책의 잔재를 청산하고,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론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북학파 인물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이 있습니다. 이때부턴 그래도 이성적으로 보는 눈이 생긴 겁니다. 무려 100년이 소요된..
친명배금과 같은 이분법적 시선을 가진다면 역시 발전이 더뎌집니다.
여진족과의 관계는 대한제국과 청나라와의 1909년 간도협약,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체결되는 시모노세키 조약까지 이어지지만, 그건 이후 일제강점기 때 설명해 드릴 것이고, 우선은 여기까지 알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일본 봅시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과 한국이 철천지원수입니다. 당연한거죠?
이 관계가 복원되는 계기가 뭐였냐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들어선 에도 막부입니다.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라이벌 관계였거든요.
이 점을 강조하며 조선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서 화해의 요청을 건넵니다. 그러면서 다시 외교가 수복됩니다.
그 수복되었던 조약을 기유약조라고 하죠 1609년. 바로 광해군 때입니다. 조선 전기 외교 편에서 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선조 때는 통신사를 재파견하기 시작했죠. 이 통신사의 역할이 뭐냐.
중국에서 조선, 그리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통신사 말고도 뒤에 가면 수신사가 나오는데, 이 둘의 차이점 미리 알아두고 갑시다.
수신사는 개항 이후에 활동하고 있는 사절단인데, 이들은 서양의 문물이 일본에 들어오면 그 문물을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했습니다.통신사와 문화 전파의 흐름이 반대죠

이렇게 관계를 회복하다가 숙종 때 독도 문제가 생기죠. 아까 했던 tmi, 평범한 어부 안용복의 독도 인정 여행 기억입니다.
사실 조선은 초기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비워놓는 공도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왜냐면 왜군이 자주 침략하니까 주민 보호가 너무 어려웠던 탓이죠.
그러다가 숙종 때 되면 놀랍게도 울릉도의 일본사람들이 이젠 울릉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요.
당시에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가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지나가는 조선인의 배를 강탈하기도 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안용복이라는 어민이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일본 국왕에게 인정받아옵니다.
그저 그에겐 생계를 위한 액션일지 모르겠지만 그 행동이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는 게 중요하죠.
대한제국 시대로 가면 1900년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독도를 건드리지 마라고도 합니다.
근데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일본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시키는 모습을 보이죠.
그러고 나서 5년 후에 나라가 완전히 넘어가잖아요? 식민지화의 첫 출발이 독도였던 거죠.
조선 후기의 조직과 외교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분량도 그렇고 약간 쉬어가는 느낌이죠?
다음 글,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는 이번 분량보다 꽤 많을테니, 이런 시간도 있어야죠.
별로 한 것도 없으니 오늘 내용은 그냥 한 번만에 싹 머릿속에 넣어둡시다~.
| 1592 임진왜란 | 광해군 | 인조 | 효종 | 숙종 | 정조 | ||
| 여진 | 후금 | 중립외교 강홍립 투항 |
정묘호란 병자호란 | 북벌론 : 송시열, 윤휴 나선정벌 (러) |
백두산 정계비 |
북학론 : 박지원, 박제가 | |
| 일본 | 3포 왜란 (중종) : 비변사 설치 을묘왜변 (명종) : 비변사 상설기구화 5위 영진군 진관체제 |
비변사의 권력 강화 의정부 6조 약화 5군영 : 훈련도감, 직업군인 속오군 : 양반,노비 제승방략체제 |
기유약조 | 통신사 중-조-일 |
울릉도, 독도 (안용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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