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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조선 후기 [정치]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하기 앞서

 

이제 조선 후기 정치를 볼 텐데요, 사실 조선 후기에는 세상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그 시기의 조선은 유독 정치 쪽에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꽤 보이죠.

 

설명을 위한 전기의 모습도 간략히 서술할 것인데, 복습한다 생각하시고 기억과 맞는지 확인해봅시다.

 

 

조선 전기는 15세기와 16세기로 나누었죠? 그리고 전, 후기는 1592 임진왜란이 분기점이고요.

 

15-16세기로 넘어가며 주도 세력이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바뀐다는 것.

 

이 억압받던 사림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림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관료의 자리가 부족하게 됩니다.

 

서로 부족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또 각자 무리를 지어 당이 형성되는것 까지 기억나시죠.

 

 

사림이 권력을 장악한건 대략 선조 시기부터, 이때부터 붕당정치가 형성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림이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나뉘게된 원인이 뭐였나요?

 

바로 척신 잔재의 청산, 이조 전랑의 직위입니다. 척신 잔재 청산에 대한 강경파는 동인당 쪽으로, 온건파는 서인당 쪽으로 나뉘었죠.

 

그리고 이조전랑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강력한 직위이니 후보 1번을 지지하는 쪽, 2번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뉜 겁니다.

 

 

그런데 동인당이 다시 또 북인당과 남인당으로 나뉘게 된다 했습니다. 그 원에는 바로 정여립과 정철이라는 인물이 엮여있습니다.

 

특히 정철에 대해서는 바로 전 글의 문학파트에서 잠깐 언급드렸습니다.

 

무갑기을 4차례 사화 동안 죽은 사림들보다, 정철의 기축옥사에 의해 죽은 동인이 더 많죠.

 

정여립은 원래 서인 쪽이었다가 동인당으로 옮긴 인물입니다. 그럼 당연히 서인당 쪽에서 정여립을 바라보는 시선이 안 좋겠죠?

 

서인당은 그래서 정여립을 죽일 건수 하나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여립은 자신의 고향에서 심신을 수행하기 위한 무술 연습을 해버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빌미로 정여립을 동인당의 역모 주동자라고 몰아갑니다. 정치라는 게 참..

 

이러면서 정여립과 동인들을 한데 묶어 몰아붙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정철입니다.

 

 

속미인곡, 사미인곡, 관동별곡 등등 조선 문학 그 자체인 정철의 이면이라 볼 수 있죠.

 

결국 이렇게 동인들을 축출해 내며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동서인으로 나뉘기 이전, 사림들이 집권하기 시작할 때의 왕이 선조라고 했었습니다.

 

선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있나요 혹시?  되게 이기적인 왕이죠. 자기보다 조금 인기가 많고 존경받으면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선조 말기, 임진왜란을 겪을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이런 인품 때문에 굉장히 화를 많이 입죠.

 

 

이런 선조에게 권력을 장악한 정철이 ’ 건저의사건‘을 올립니다. 건저의 란, 세자 책봉입니다. 이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죠.

 

왕이 있으면 세자 책봉을 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근데 독특한 선조는 이상한 데서 열을 받습니다. ’ 뭐야, 나 아직 젊은데, 그만두라는 거야?‘

 

이러면서 서인들은 어이없게 몰락하게 됩니다. 그럼 자연스레 다시 동인이 집권하겠죠. 이 동인이 북인당, 남인당으로 나뉜겁니다.

 

척신 잔재 청산의 시비로 동인당/서인당으로 갈라진 것처럼, 서인 잔재의 처리의 시비로 동인당도 나뉩니다.

 

사림이 분화할때, 척신 잔재 청산에 있어 강경파였던 동인당. 그 동인당 속에서도 서인 또한 완벽히 없애버리자. 하는 북인과

부드럽게 가자 하는 온건파 남인으로 나뉘죠.

 

정리하자면 강경파 – 동인당, 북인당 / 온건파 – 서인당, 남인당입니다.

 

그런데 이제 선조니까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겠죠?

 

세자 책봉건으로 서인들을 축출해 버린 선조는, 전쟁이 나서 밀리기 시작하니 그제야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북인 쪽과 연결되죠. 광해군도 강경파 북인처럼 강성한 인물이었거든요.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비록 끝에 가서 폐모살제하는 등 삐딱선을 타는 모습을 보이지만, 공납과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탁월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당시의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망할뻔했지만 명나라가 구해줬었죠.

 

그런 명나라와 오랑캐 후금을 두고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사대부들의 거센 저항을 받습니다.

 

결국엔 중립외교와 폐모살제 때문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친명배금 체제로 돌린다고 한 번 앞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조선 후기 - 외교에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결국 광해군 북인 정권은 무너지고, 인조와 남인당, 서인당으로 정권이 교체됩니다. 당이 왜이리 많아~ 헷갈리죠?

 

족보와 함께 보시면 확 와닿을겁니다.

 

 

붕당 정리 1

이렇게 결국 남인당과 서인당, 두 세력에 의해서 조선 후기의 정국이 유지가 될겁니다. 대략적 붕당 정리를 끝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남인과 서인이 어떤 모습으로 정국을 유지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인과 남인의 정치

 

 

광해군이 실시한 명과 후금과의 중립외교에 불만이 많았던 서인들은, 집권하자마자 명확히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합니다.

 

결국 이 때문에 후금이 쳐들어온 정묘호란이 발생했죠.

 

이름만 바꾼 청나라가 다시 쳐들어오는 병자호란 때는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볼모로 8년간 청에 잡혀있기도 했습니다.

 

그 봉림대군이 돌아와서 왕위에 오른 것이 효종입니다. 근데 이 효종이 죽으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집권세력으로 서인당, 남인당이 남았다고 했는데 효종이 죽으면서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 때 아주 불타는 사회적 주제인데, 상복을 어느 정도 입느냐에 따라 논쟁하는 겁니다.

 

 

.. 지금 우리가 보기엔 너무 의미 없죠?

 

왜 이런 논쟁이 생겼냐면, 우선 인조로 돌아가야 합니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효종의 친어머니를 두고 새로운 어린 신부 자의대비와 결혼합니다.

 

그럼 자의대비는 효종의 새어머니, 즉 계모죠? 그런데 이 계모가 어려도 너무 어린 나머지, 효종보다 어려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자의대비 보다 효종이 먼저 죽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새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첫째인 장남이 죽으면 엄마는 상복을 3년 입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아닌 아들이 죽으면 1년만 입습니다.

 

이 당시에 장남과 그외 아들의 차별이 엄청났거든요.

 

근데 효종은 인조의 첫째 아들이 아니죠? 첫째 아들은 소현세자입니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8년간 붙잡혀있었는데, 청나라의 기술과 신문물이 너무나 좋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청을 본받아야 한다고 떠들기 시작했죠.

 

근데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라 인조와 대신들은 언제든 청나라에 복수하리라 이를 갈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결국 원인 모를 이유로 소현세자는 귀국 2달 만에 사망합니다. 아마 타살이겠죠

 

그래서 둘째인 봉림대군,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겁니다. 이런 효종의 사망을 두고 논쟁한 것을 기해예송이라 합니다.

 

 

 

각 당의 입장을 보면..

 

서인 : 둘째는 둘째다. 원칙대로 1년 입어야 한다

 

남인 : 아무리 둘째지만 한나라의 왕이므로 장남에 준해서 3년을 입어야 한다.

 

 

효종이 사망하고 왕위에 오른 현종은 즉위 직후여서 당시의 기득권인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원칙대로 가는 게 맞다며 서인 편을 들어주죠.

 

여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아까 말한 효종의 새어머니, 자의대비가 워낙 젊은 탓에 이번엔 효종의 아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정리해보면 인조 - 효종 - 현종인데, 인조의 아내가 효종과 효종의 아내보다 오래 살고 있는거죠.

 

현종의 입장에선 아빠 엄마가 할머니보다 일찍 죽은겁니다. 절대 그 둘이 단명한게 아니라 자의대비가 너무 젊은 탓이었죠.

 

이 효종비의 사망을 두고 서인과 남인은 또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 논쟁합니다. 갑인예송입니다.

 

 

 

이번에도 서인과 남인의 입장은 저번과 동일했습니다. 기해예송때 서인은 원칙을, 남인은 왕의 차별을 주장했었죠.

 

서인 : 원칙대로 9개월을 입어야한다.

 

남인 : 그래도 왕은 달라야 하지 않느냐, 장남 대우를 위해 1년을 입어야 한다.

 

 

현종은 또 결정해야겠죠?

 

이번에는 현종에겐 힘이 있습니다. 어쩔수 없이 기득권 손을 들어준 기해예송과는 달리 목소리를 낼 수 있었죠.

 

이런 현종이 가만 생각해 보니 서인들이 괘씸한 겁니다. 서인들의 입장이 뭐였죠?

 

'아무리 왕이라도 장남이 아니므로 원칙대로 가야 한다' 였습니다

 

 

이는 조금 세게 말하면  '왕이고 뭐고 예외는 없다. 왕이나 사대부나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이겁니다.

 

반면에 남인은 '그렇지 않다. 왕이니까 대우를 해줘야 한다' 라고 했었죠. 왕 입장에선 당연히 남인이 좋겠죠?

 

그래서 이번 갑인예송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예송논쟁의 승리자는 남인이 된 거죠.

 

 

 

이런 사소한 문제로 당시에는 정말 사활을 걸고 싸웠습니다. 단지 상복을 얼마나 입는지일 뿐인데, 정권이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죠.

 

옷 입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 예송논쟁 이야기는 3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땐 굉장히 뜨거웠지만 지금은 이런 주제로 어느 누구와도 뜨거운 논쟁을 할 순 없을 겁니다. 시대의 차이죠.

 

과거의 시점과 여러분의 현재 시점은 확연히 틀린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사회에서도 현재 뜨거운 게 있죠. 채식주의라던가 페미니즘이라던가..

 

이걸로 누군가는 박 터지게 싸우고 있지만, 또 시간이 흘러 미래의 인류가 본다면 정말 어리석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은 틀려’ 하는 모습들이 과해지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기 마련이죠.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줄어들게 되어있거든요. 너무 인문학적 시선으로 돌아봤나요?

 

 

다시 돌아가서, 남인이 이렇게 권력을 장악하나 싶었는데 숙종 때 환국이 옵니다. 환국은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해서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환국의 결과, 한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죠.

 

이전 현종 때 예송논쟁을 보면 서인이 이겼다가, 남인이 이기는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은 이긴 뒤에도 상대를 완전히 몰아내진 않았죠.

 

그런데 환국 단계로 오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살아’ 마인드가 팽배해집니다. 숙종은 권력 몰아주기를 하면서 왕권을 무한대로 복사하죠.

 

 

 

 

 

2. 숙종의 환국 정치

 

숙종이 참 대단한 게, 14살 중학생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조선 왕조가 30명이 채 안되는데 그 왕 중에서도 가장 정통성 있는 왕으로 꼽히는 인물이 숙종입니다. 

 

그러니까 후궁 자식이 아니라 정비의 자식, 완벽히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온 왕입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정통성 있는 왕이 얼마나 입김이 쎄냐면, 이 기록을 한 번 보시죠. 조선은 왕이 죽으면, 다음 왕때 죽은 왕에 대한 평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럼 숙종이 올랐으니 현종에 대한 평가를 해야겠죠? 근데 현종 때 한건 사실 거의 없습니다. 예송 때문에 정권이 너무 뜨거웠죠.

 

이때 예송을 이끌었던 서인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입니다.

 

 

앞에서 왕의 입장에선 서인들이 기분 나쁘다고 했었죠? 원칙주의를 주장하면서 왕을 사대부랑 똑같이 취급하니까요.

 

이때 숙종이 신하들에게 현종의 치적들을 쭉 써오라고 했는데, 예송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신하가 예송을 적으면서 서인 송시열의 잘못을 적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적을 수 없었죠.

 

송시열은 정치에 직접 가담하진 않지만, 뒤에서 자신들의 제자들을 조종하여 조정의 여론을 장악해 가는 실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송시열을 비판하는 건 쉽지 않았거든요. 예송의 끝엔 남인이 이기지만, 아예 서인이 축출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상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송시열을 욕하는건 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에게 담임의 욕을 적으라는 것과 비슷한겁니다.

 

 

당연히 왕의 입장에서 서인들이 주장한 ‘원칙대로’는 기분이 나쁘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송시열에 대한 욕을 해야 하는데 그거를 안 하는 겁니다.

 

중학생의 나이였던 숙종이 그걸 받아 읽어보더니,  ‘왜 송시열이 잘못했다는 말이 없는가? 이곳에 다시 적어 제출하라’ 명합니다.

 

성리학과 유교의 나라에서 중학생이 조선의 대 유학자 송시열을 비판하라 한 것이죠.

 

 

깡이 대단한 겁니다. 쓰는 사람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죠. 왕은 쓰라고 하고, 또 쓸 수는 없고.

 

그래서 직설적으로는 얘기하지 못하고, 뱅뱅 돌려서 쓰고는 숙종한테 제출합니다.

 

 

숙종은 다시 현종에 대한 평가와 송시열에 대한 평가를 읽어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그러면서 얘기하죠. ‘이 문서에 송시열이 잘못했다는 내용을 반드시 적어라’

 

.. 다시 말하지만 십대의 나이입니다. 

 

나중에는 송시열은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당대의 실세를 죽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고려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만해도 성장하는 이자겸을 미리 죽이긴커녕 오냐오냐 해주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지닌 숙종은 권력을 번갈아 몰아주며 왕권을 복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서인당, 이번에는 동인당, 또 서인당.. 이런 식으로요.

 

동인당과 서인당에 권력을 주는것과 숙종의 왕권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싶죠?

 

숙종은 권력을 말그대로 올인해줬습니다.  현종, 효종때처럼 서인과 남인의 공존이 아니라 아예 한 편에 치우쳤죠.

 

그러니 서인과 남인은 숙종 눈치만 보는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걸 바로 환국이라합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게요.

 

현종 때 두 번째 예송논쟁,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실세가 됐다고 했죠?

 

근데 이 남인이 환국 과정 중에 쫓겨납니다. 이걸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아까 말한 숙종의 권력 몰아주기가 시작된거죠. 근데 또 쫓겨난 남인이 기사회생합니다. 그럼 이번엔 반대로 서인이 이땐 몰락하겠죠?

 

이걸  기사환국이라 합니다. 이렇게 또 남인이 권력을 잡고 가나 했더니..

 

 

남인과 이어진 인물 중에, 장희빈이 있습니다. 한번쯤 들어보셨죠? 결국 사약을 먹고 죽게 됩니다.

 

이 장희빈이 쫓겨남과 함께 남인이 또 몰락합니다. 이건 갑술환국입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쫓겨날때, 아예 완전히 축출되면서 소멸합니다. 이렇게 권력이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왕권이 아주 강력해지죠.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쳐 최종적 승리자는 서인이 되는 겁니다.

 

 

갑술환국 이후 살아남은 서인은 분열합니다.  아마 [조선 전기 정치] 글에서 이름만 잠깐 보셨을 텐데, 노론과 소론이죠.

 

이 중에서 소론은 경종를, 노론은 영조을 지지합니다.  (영조는 경종의 동생입니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니 소론은 쫓겨난 남인과 비슷한 계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 경종이 왕위에 오르며 소론이 이기는 듯했습니다. 근데 경종이 좀 일찍 죽어버립니다.

 

경종은 그 전설의 게장과 감을 함께 먹고 죽은 왕이죠. 그리고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처방해 준 인물이 바로 연잉군, 영조입니다.

 

 

이 부분이 영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영조의 아킬레스건이 됩니다. 영조가 경종을 죽였다며 끊임없이 발목을 붙잡죠.

 

이러면서 영조 때 난도 많이 벌어지죠. 어쨌든 간에 결국 경종이 죽고, 그의 동생 영조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쪽이 이후 시대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근데 숙종 시기에 보여준 과정에서 안 좋은 모습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래서 영조와 정조 때 펼쳤던 정치 형태가 탕평정치입니다.

 

환국정쟁, 예송논쟁 등으로 너무 당파싸움이 심하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죠.

 

탕평정치를 보기전에, 붕당을 한번 더 표를 통해 시각화해봅시다.

 

붕당 정리 2

 

 

첫번째 붕당 정리표와 이어서 보시면 흐름 이해에 도움이 될겁니다.

 

 

 

 

3.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본격적으로 탕평 정치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왕위의 족보 잠깐만 보고 갑시다.

 

영조 다음이 정조인데 사실 정조는 영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입니다.

 

원래 왕위에 올랐을 영조의 아들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조가 아들을 직접 죽였었죠.

 

영조가 봤을 때 사도세자는 도저히 정치를 이끌어나갈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조의 아들이지만 죽어버린 사도세자, 그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는 세력이라 했었죠, 이들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좋아했을까요?

 

A: 정조는 영조의 손자니까 영조 지지 세력인 노론은 좋은 거 아닌가요?

 

아니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건 영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는 당인거죠. 이런 상황에서 정조가 왕에 오른다? 갑자사화를 떠올려봅시다.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에 가담한 인물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처럼 노론들도 화를 입을지 모르는 일이죠.

 

이런 흐름 먼저 알아두시고, 영조부터 가보겠습니다.

 

 

 

영조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란겁니다. 지금의 나이로 거의 120세까지 살았죠.

 

소식과 채식을, 그리고 인삼을 무지 많이 먹은 기록이 남아있더군요. 그의 장수 비결일지도..?

 

그런데 영조가 이렇게 오래 살다 보니 신하들은 그동안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실록>에 적혀있는 기록에 의하면, 영조가 나중 가면 신하들에게 얘기를 시작할 때, 이런 말로 시작하곤 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 아비를 잘 아는데..’  신하들은 어떨까요? 아빠가 모셨던 왕이니, 꼼짝 안 하고 따르죠.

 

 

기본적으로 조선 시스템은 신하들이 나이가 많고, 왕이 나이가 적습니다.

 

그래서 왕을 가르치는 홍문관도 있었고, 나쁜 일이 생기면 상이 부덕하기 때문이라며 자주 왕을 괴롭히곤 했죠.

 

실제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이 기세를 펴고 왕권통치를 제대로 펼친 시대는 불과 몇 대에 그칠 뿐이니까요.

 

특히 정통성이 약한 군주나 나이 어린 왕이 집권했을 땐 재위기간 내내 기를 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오죽 답답했으면 조선 사신에게 이런 말까지 했을까요.

 

“요즘 너희 나라 백성이 가난하여 다 굶어 죽게 생겼다던데, 내가 보기엔 군약신강이 원인이다. 이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전하라”

 

 

그런데 이런 와중에 굉장히 특이한 왕이 등장한 겁니다. 왕이 너무 안 죽습니다. 갈수록 나이가 너무 많아집니다.

 

나이가 갑인 유교의 나라에서 신선이 되어버리니 왕권이 강력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의 아버지 숙종도 왕권이 굉장히 강했는데, 영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영조, 그리고 정조가 탕평 정치를 시행합니다. 그것도 그냥 툭 던진 게 아니라, 철저히 준비하고 실행했죠.

 

탕평을 방법/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 영조와 정조를 구분하며 봅시다. 

 

 

 

탕평 방법)

 

영조는 신하들에게 더 이상 당을 나누지 말라며 성균관에다 비석까지 세워버립니다. 이게 탕평비죠.

 

이때의 탕평 방법은 붕당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완론 탕평입니다. 

 

반면에 정조 같은 경우는 다릅니다. 준론 탕평을 탕평 방법으로 택하죠.

 

붕당을 인정하는 대신, 왕이 중재의 역할을 하여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리는 방식입니다.

 

 

자존심 강한 대신들을 두고 이럴 수 있었던게, 정조는 너무 똑똑했거든요.

 

그게 어느 정도냐면 주변에서 사관이라던지, 승지, 비서실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인용구를 사용한다 칩시다.

 

그럼 이 문장이 어디서 따온 건지 적어야겠죠? 근데 이게 굉장히 헷갈리고 어려운 일입니다. 책이 워낙 많아야 말이죠.

 

그렇게 신하들이 끙끙대고 있으면 정조가 지나가면서 툭 던집니다.

 

‘ ~책 ~쪽 ~번째 줄에 있던데? ’

 

그럼 승지나 사관들은 일단 정조 앞에서는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문 밖에 나와서는

 

‘에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거를 다 알아’ 하면서 책을 펴봅니다.그러면 정조가 말한 정확한 그 위치에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실록에 쓰인 사실이어서, 정조가 중재 역할을 한다는 걸 신하들은 모두 수용했죠.

 

동시에 붕당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습니다. 책임 정치하지 않으면 바로 똑똑한 정조가 지적하니까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조는 기본적으로 산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산림이란 아까 말한 송시열처럼 직접 정치에 가담하지 않고 뒤에서 제자를 조종하는 세력입니다.

 

그리고 서원, 옛날에는 서원이 인재양성의 중요한 도량이 되었는데 이제는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서원을 정리합니다.

 

이 서원 정리 같은 경우는 나중에 흥선대원군 때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다음 이조전랑 있죠? 이조전랑 때문에 사림이 동, 서인으로 나뉘고 난리가 났잖아요.

 

그래서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킵니다.  그리고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경국대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속대전>을 편찬합니다.

 

 

 

경제 쪽으로는 군대를 안 가는 대신 포를 낸다 했었죠.

 

기존은 1년에 두 필을 내는 거였는데,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1년에 한 필만 내도록 합니다. 무려 50% 감면이죠.

 

사회적인 면에서는 청계천 준설 작업을 실시하고, 신문고를 부활시킵니다.

 

신문고는 태종 이방원 때 생긴 거죠? 근데 이게 기능은 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기구였습니다.

 

이걸 본격적으로 복원시킨 거죠. 또 사형수 삼심제라고 , 사람을 죽일 땐 신중해야 하니 3번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였습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국가적 사업으로 백과사전 작업을 단행합니다. 바로 <동국문헌비고>

 

동국이 우리나라입니다. 이 동국문헌비고 같은 경우,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국가적 작업이라 정조 때까지 쭉 이어집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이렇게 정치를 잘해버리니, 정조가 부담이 컸을 겁니다. 그래도 워낙에 똑똑하다 보니 잘 따라옵니다.

 

어쨌든 정조는 처음 말한 것처럼 왕위에 올라갈 때 노론과의 대립 구도가 나타납니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정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딱 한 마디 합니다. ‘나 사도세자의 아들이야’

 

이건 거의 선전포고죠.

 

이거랑 똑같습니다. ‘노론들, 너희가 우리 아버지 죽인 거 내가 잘 알고 있어. 그 아버지의 아들이 나야. 정신 똑바로 차려’

 

 

영조는 노론 세력이고, 나이도 많으니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정조는 노론들의 견제를 대비하여 왕권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서 아예 신하들을 데려와 앉히고 자기가 가르칩니다.

 

차별받던 서얼 출신적극 등용하죠. 똑똑한 왕답게 실력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영조도 그렇고 정조도 그렇고 특이합니다.

 

정상적이라면 홍문관 경연을 통해서 신하들이 왕을 가르쳐야 하는데 말이죠.

 

영조의 경우는 영조가 너무 늙어서 영조가 훈계했고, 정조의 경우는 정조가 너무 똑똑해서 신하들을 가르친 겁니다.

 

이렇게 정조가 규장각에 신하들을 앉혀놓고 가르치는 걸 초계문신제 라고 합니다. 신하들을 초대하여 계몽시킨다.입니다

 

 

그리고 노론의 견제 정권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쿠데타 당하지 않도록 힘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장용영이라는 정조의 친위부대를 만듭니다.

 

또 할아버지 영조가 <속대전>을 편찬한 것처럼 <대전통편>이라는 법전을 만듭니다.

 

책들 중에서 이런 법전들은 꼭 키워드를 기억해 두셔야 시험이 편합니다.

 

세조-성종의 경국대전,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 흥선대원군의 대전회통 등등.

 

 

정치면에선 이런 모습 있었고요 이제 경제 볼게요. 정조의 경제 정책이라 하면 신해통공이죠.

 

이건 뭐냐면, 당시 시전상인들에겐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시전상인들은 종로에서 허가를 받고 장사를 하는데, 허가없이 가게 앞에서 난전을 펼치는 사람을 몽둥이로 패서 쫓아낼 수 있는 권한.

 

어지러운 전을 금한다~ 이런 겁니다. 즉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을 통해 독점적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걸 정조가 없앱니다.  말 그대로 신해년에 통공, 누구에게나 장사할 권리를 주겠다는 겁니다.

 

이는 다음 경제 글에서 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쨋든 정조가 추구했던 사회는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였다는 걸 보여주죠.

 

 

그리고 사회적으로 본다면, 이전에 지방의 사림들이 만들어놓은 서원, 향약, 유향소 등등..

 

서원은 이미 할아버지가 정리를 했죠?

 

향약은 사림들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권한으로 작동한 건데, 정조가 이 통제주권을 사림에서 수령으로 넘겼습니다.

 

수령은 왕이 파견한 자신의 오른팔이니, 이 수령이 향약을 컨트롤하도록 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문화는 아까 말한 동국문헌비고, 영조 때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쭉 내려오고요.

 

<동문휘고>라는 게 있습니다. 이거는 대외 관계를 정리한 책입니다.

 

 

그리고 정조의 꽃,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꿈을 펼치기 위해 수원화성을 축조하죠.

 

아마 조선후기 문화 편에서 다시 등장하지 싶네요.

 

 

이렇게 해서 정조, 영조 이 시대 환국으로 어려웠던 상황들을 탕평을 통해 다시 되찾고, 중흥기를 되찾게 되는 모습입니다.

 

근데 잘 가다가 정조가 너무 갑자기 죽어버립니다. 정확히 1800년에 죽죠.

 

정조가 죽고 나자, 정조의 똑똑함이 오히려 독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정조가 너무 똑똑한 나머지 살아있을 때 만기친람이라 하여 모든 걸 정조가 다 했습니다.

 

그러니 그 정조가 죽게 되면 그 역할을 누가 하겠습니까.

 

명확한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닌, 정조 단 한 사람에게 의존해서 개혁이 이루어진 게 굉장히 한계가 되었죠.

 

 

 

 

정조 이후의 조선)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이때부터 순조, 헌종, 철종 이렇게 이어지는데요.

 

이 시대를 우리는 세도정치라고 합니다. 소수 가문에 의해서 관력이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이죠.

 

 

이 소수 가문에는 대표적으로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강력해진 비변사, 그리고 5군영을 장악하면서 이들이 모든 권력을 차지하죠

 

이때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냐면, 바로 매관매직. 관직을 사고파는 겁니다. 아직 하나 나왔는데 벌써 어질 하죠?

 

그리고 돈을 주고 관직을 차지했으면 돈을 다시 복구해야겠죠. 매관을 통해 관리가 된 이들이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삼정의 문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죠.

 

 

삼정이라 함은 전정 (토지세), 군정 (역), 환곡 (빈민 구휼제도)입니다.

 

특히 환곡은 쌀이 안나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하는 가을에 갚도록 하는 건데 이 환곡이 부패하면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러니까 19세기는, 정조 사후에 그냥 난리가 나는 거예요.

 

이때는 거의 민란의 시대라 할 정도로 썩을 대로 썩은, 이제 조선 왕조 500년은 끝나가는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 한 명이 죽었을 뿐인데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많은 시사점을 보이죠.

 

똑똑한 정조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요?.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죽어버린 탓일지도요.

 

 

조선 후기 정치편은 여기서 매듭짓겠습니다. 

 

근데 매듭짓는다곤 하지만 조선 전기를 읽어보신분은 아시겠죠?

 

모든 파트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어서, 다른 글을 읽을때도 서로서로 복습이 되는점이 한국사가 쉬운 이유죠.

 

고생하셨습니다.

 

 

 

  방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도 정치
영조 탕평비
완론탕평
산림 인정 x
서원 정리
전랑 권한 약화
<속대전> 편찬
균역법 청계천 준설
신문고 부활
사형수 삼심제
<동국문헌비고> 순조, 헌종, 철

소수가문

(안동김, 풍양조)

매관매직 성행

삼정의 문란
정조 준론탕평 규장각 설치
초계문신제
서얼 등용
장용영 (친위)
<대전통편>
신해통공
(금난전권 x)
향약의 권한을
향리에서 수령으로
<동국문헌비고>
<동문휘고>
수원 화성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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