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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조선 전기 [행정, 조직, 외교]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참, 이 문장은 이번 글을 다 작성하고 난 뒤에 쓰는 건데요, 내용을 구겨 넣다 보니 짧을 거란 예상과 달리 조금 깁니다. 파이팅!

 

 

1. 조선 전기의 행정 제도

 

앞의 글에서 15세기와 16세기, 조선 초기에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왕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중앙집권 추구 과정 속에서의 중앙과 지방 행정 조직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고려는 행정이 2성 6부, 지역이 5도 양계였었죠. 

 

조선은 행정에서 중앙은 의정부와 6조 체제, 지방은 8도 체제입니다.

 

1-1. 중앙 행정

 

먼저 의정부와 6조 체제.

 

행정 체제

 

이걸 보면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어떤 조직이 왕권을 강화시키는지, 그리고 어떤 조직이 왕권을 약화시키는지입니다.

 

먼저 왕권을 강화시키는 제도로는 태종과 세조가 시행했던 6조 직계제. 바로 저번 글에서 했죠? 

 

그리고 승정원. ‘승’이 들어가면 비서 기능을 한다했던거 기억나시나요?  고려에선 중추원의 승선이었죠.

 

의금부는 왕의 직속 사법기관입니다.  주로 ‘이것은 반역이옵니다’ 이런 말이 들려오면 왕이 금부도사에게 시키죠. 당장 잡아오라.

 

 

반대로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도 있겠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재상으로 구성된 의정부.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했던 왕이 세종이었죠. 이 ‘서’는 서명입니다. 의정부의 사인이 떨어져야 일이 돌아갔었죠.

 

그리고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3사. 고려의 3사는 단순히 회계만을 담당한다고 했습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 구성된 조선의 3사는 왕의 독재를 막는 역할이었습니다.

 

 

사간원의 ‘간’은 간쟁으로, 왕이 잘못된 정치를 하면 ‘전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제 목을 치시옵소서’ 하며 왕을 말리고,

 

사헌부는 주로 감찰 기능을 했습니다.  홍문관 경연과 서연을 담당하여 왕을 교육했죠.

 

왕을 교육하는 홍문관은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이 관리로 있었습니다. 유교 사회에 왕보다 어린 자가 왕을 가르치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사간원과 사헌부에 모두 속한다 하여 ‘양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조금 기억해 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5품 이하의 관리에 대한 서경권이 있었습니다.

 

여기의 서도 서명인데 그러니까 5품 이하의 관리들을 임명할 때 양사가 사인을 해줘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 그 6품의 단붕이라는 관리 말이야.. 청렴결백하더라고? 사인해 줄게 ’ 하면서 단붕이는 6품 관리가 되는 거죠.

 

근데 '저기 뭐 7품의 항붕이라는 사람 있던데, 그 사람은 안 되겠어.’ 이러면 항붕이는 관리를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양사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거죠.

 

 

이런 왕권과 관련된 조직들 말고도 다양한 조직이 있었습니다.

 

먼저 한성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양에서 업무를 봤습니다. 서울시장 이런 느낌?

 

그리고 춘추관에서는 역사를 담당합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도 여기서 관리하죠.

 

장례원은 뭔가 장례식이 떠오르실 텐데,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고 당시 노비들을 관리하는 기구였습니다.

 

성균관은 잘 아시다시피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중앙의 행정 제도 별거 없죠? 고려에 비하면 단순합니다.

 

 

 

1-2. 지방 행정

 

고려 때엔 행정적 성격이 강한 5도와 군사적 성격이 강한 양계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조선은 8도로 일원화되어있습니다.

 

8도 밑에는 부-목-군-현이 있는데 (지금의 시, 구, 동처럼) 8도에는 관찰사를, 부목군현에는 수령을 파견했습니다.

 

관찰사는 수령들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죠.

 

이 관찰사가 머물고 있는 관청을 감영이라 합니다. 감영은 그럼 전국에 몇 개 있겠습니까?  8도니까 8개겠죠?

 

고려 시대에도 관찰사와 똑같은 기능을 한 안찰사가 있었습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유의해주세요.

 

근데 고려의 안찰사보다 조선의 관찰사가 훨씬 더 권력이 셉니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의 향리들의 힘이 컸거든요.

 

 

그럼 파견된 수령은 무슨 일을 할까요?

 

수령이 해야 하는 일 중에 수령 7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수령 7사 중에는 결혼시키는 것도 있었습니다. (중매업).

 

당시에는 14-15세가 결혼 적령기로, 20세가 넘으면 노총각 노처녀라고 불렀습니다.

 

근데 이 노총각 노처녀를 국가에서 우한으로 취급합니다. 국가에 뭔가 가뭄이 들고, 재해가 일어나면 노총각 노처녀 탓이라 하죠.

 

그래서 수령이 마을에 갔는데 노총각 노처녀가 있다? 그러면 그 수령은 감점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결혼 장려금처럼 결혼하면 쌀을 주기도 했었죠.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나 봅니다.

 

지금이야 결혼을 주로 30대에 진행하지만 만약 조선시대였다? 이건 국가적 재앙이었습니다.

 

 

아무튼 수령은 수령7사 뿐만 아니라 행정, 사법, 군사 등등 거의 마을의 모든 일을 관리했죠.

 

근데 수령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수령이 해당 지역에 대해 잘 모를 것을 대비하여 수령을 보좌해 주는 향리가 있습니다.

 

고려 시대 향리와는 아주 다릅니다.

 

고려 시대 향리는 속군, 속현, 향, 부곡, 소를 다스리는 실질적 지배자고,

 

조선 시대 향리는 사또가 누워서 ‘게 이방 있느냐’ 하면 ‘네~ 사또!’ 하면서 쫄쫄쫄 등장하는 그런 포지션입니다. 약간 가볍죠.

 

 

왜 그러냐면,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들이 파견되지 않는 지역이 있었기에 향리가 그 지역을 장악했지만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부목군현 가릴 것 없이 모두 수령이 파견되었습니다. 자연스레 향리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죠.

 

향리가 지역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변하는 거죠.

 

이 향리들도 단안이라고 나름대로 자기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관찰사와 수령이 전국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또 막 보내는 건 아니고 파견에도 원칙이 있었습니다.

 

상피제라 하여 그 지역 출신은 그 지역에 파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임기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옮기도록 하죠.

 

수령의 부정과 비리를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영리한 수법입니다.

 

 

이렇게 중앙에서 전국으로 왕의 오른팔 격인 관찰사와 수령을 파견하는 건 중앙집권적 제도에 가깝습니다.

 

고려 성종이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해서 왕권을 강화했던 거 잠깐 상기해 주고요.

 

그런데 혹시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으로 들어가 버린, 향촌 자치를 추구했던 사림들이 기억나시나요? 

 

이들 사림들은 향촌의 양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향촌에 중앙에서 수령을 보내면 그 사이에 충돌이 있겠죠.

 

그 충돌을 한번 봅시다.

 

 

 

부-목-군-현에는 당연히 사족(사림)들이 있습니다. 지방 행정 제도에 의해 향촌이 먹힌다면 이들의 권력 또한 그대로 흡수될 테죠.

 

그런데 저희는 16세기, 정권을 차지한 게 사림파라는걸 지난 글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은 어떤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힘을 유지했을까요?

 

먼저 유향소가 있습니다. 유향소는 그 지역의 여론을 형성하는 기구입니다.

 

이 유향소에서 열리는 회의를 향회라고 하죠. 향회에 참석할 수 있는 리스트도 향안이라고 따로 있었습니다.

 

 학교로 비교한다면 학생총회랑 비슷하겠군요.

 

이 리스트에 들어간 양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여론을 형성한 유향소를 통해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에게 압박을 가하는 형태.

 

 

또 있습니다. 교육기관인 서원을 설치합니다. 교육도 하고 제사도 지냈었죠.

 

뿐만 아니라 향약을 통해 그 지역의 농민들을 통제합니다. 서로 도와라 , 거짓말하지 마라 등등

 

도덕적 교화를 통해 약속을 지키게끔 하는 모습을 보였죠.

 

 

나름대로 사족들의 자치를 위한 조직들이 분명히 있는 모습인데, 당연히 중앙에서는 이런 조직들에 대해서 견제하겠죠?

 

특히 유향소 같은 경우에는 중앙에서 따로 관리하는 조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유향소의 뜻이 뭘까요? '있을 유' 를 써서 말 그대로 향촌에 있는 기구입니다.

 

중앙에는 서울에 있는 조직이라 하여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조직들의 존재로 미루어보아, 앞 시대에 비해 조선에 와서는 더욱 시스템이 정교해졌다고 볼 수 있죠.

 

어떤 부정과 비리를 막기 위한 상당히 선진적인 구조를 보입니다.

 

 

이렇게 행정 조직들을 살펴봤는데, 지금 조선 지배층의 목표는 중앙집권 추구입니다.

 

중앙집권 추구를 위해 의정부, 6조, 8도 체제를 만들었는데 그럼 각 자리에 쓸 관리가 필요하겠죠?

 

조선에 와서 관리 선발 방식이 꽤 늘어납니다.

 

고려 시대에는 음서라던지 조상덕을 보고 쉽게 관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다릅니다. 아주 실력을 중시하죠. 신분에 개의치 않고요.

 

물론 조선도 음서처럼 조상의 음덕을 받아 관직에 가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고위 관직은 노리지 못했습니다.

 

무조건 실력이 있어야 더 위로 갈 수 있죠. 과거를 보지 않고서는 절대 고위직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려 시대가 왜 중세고 조선 시대가 왜 근세인지 나누는 기준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 의지 확장. 고려보다 더욱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장이 넓어진 거죠.

 

 

1-3. 관리 선발 방식

 

 

과거를 주관하는 곳은 6조 중에서 예조.

 

문과는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양반 중인 상민 농민 모두 양인이죠.

 

근데 중요한 건 농민들은 기회가 있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빠서 볼 수가 없었죠.

 

특히나 문과는 수능처럼 1년에 한 번도 아니고 3년에 한번 보는 아주 어려운 시험이라 공부량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더군다나 최종 합격자는 33명뿐이었죠.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만큼 평생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데 농사를 지으면서 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근데 신분상 양인이어도 문과를 못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첩의 아들 서얼, 혹은 재가한 부인의 아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건 조선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고려만큼 높지 않았다는 거죠.

 

특히나 성종 때부터 여성 삶의 질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재가 금지법, 내훈 등등 모두 성종때 나온 거죠.

 

재가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문과에 응시조차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여성 차별은 점점 심해져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여성을 그저 자신이 시집간 집안의 대를 잇는 도구로 여기죠.

 

 

과거 얘기로 돌아가서, 문과가 있다면 무과도 있습니다. 이순신도 무과를 통해 장군이 되죠.

 

근데 조선은 유학자인 사대부들이 세운 거죠? 그래서 고려에 있었던 승과가 조선에는 없습니다. 대신 잡과가 있죠.

 

대부분의 관리는 이렇게 과거를 통해 뽑지만 조금 특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천거라고 하여 관리를 추천해서 뽑는 제도가 있었는데, 기묘사화 때의 조광조가 주장했던 현량과도 천거에 속합니다.

 

사림이었던 조광조가 지방에 있는 사림들을 등용하기 위해 주장했었죠.

 

 

문음이라고 고려 때 음서와 같은 제도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에 비해서 품의 범위가 더 줄어들고, 혜택 또한 줄었습니다. 조선은 철저히 실력을 중시하는 나라임을 보여주죠.

 

 

과거부터 천거, 문음은 모두 양반을 뽑는 거고, 그 외엔 취재라고 기술직을 뽑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그냥 특정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 기술이 뛰어나면 굳이 잡과를 보지 않아도 가능했습니다

 

 

1-4. 군대

 

마지막으로 군사 조직을 보면 조선 전기의 조직은 끝입니다.

 

양인 이상이면 모두 군대에 갔습니다. 근데 양반들과 노비들은 안 갔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양인은 상민인 거죠.  상민이란 양인 중에서도 양반이 아니고, 사족이 아닌 자입니다. 

 

여기서 사족은 사족(사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 사유물(노비)이라는 뜻입니다. 

 

군대는 중앙군 5위와 지방군 영진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조선 후기로 가면 5군영과 속오군 체제로 바뀝니다. 

 

이는 조선 후기 파트에서 다루겠습니다.

 

 

5위는 그림과 같이 한양의 중앙, 그리고 한양 도성의 동서남북으로 총 5 구역을 지킵니다.

 

5위

 

영진군에서은 이제 북방에는 여진족도 있고 하니 국방의 요충지에 영을 설치합니다.

 

진도 마찬가지로 국방의 요충지에 설치된 것인데, 영과 진에 차이점이 있다면 진은 진관 체제의 방식으로 방어합니다.

 

진관 체제란 지역방어 체제인데, 즉 외적이 쳐들어오면 해당 지역에 설치한 진에서 맞서 싸우는 겁니다

 

다른 지역과 막 손을 잡거나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맞서 싸웁니다.

 

만약 그 지역의 진이 뚫린다? 그럼 또 다음 진에서 맞서 싸웁니다.

 

지역에서 자치적으로 국방을 맡았죠. 축구로 치자면 대인방어..? 랄까요.

 

집결하여 싸우는 방식은 제승방략 체제라고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럼 진에서는 누가 전장을 지휘할까요?

아까 수령이 행정 사법 군사 모두 담당한다 말씀드렸었죠.

 

파견된 수령이 그 지역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싸우는 겁니다.

 

 

5위와 영진군 말고도 예비군 느낌으로다가 잡색군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없는 양반과 노비 모두 예비군을 갔다가, 전쟁이 터지면 잡색군으로써 함께 투입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군사 체제까지 끝마쳤습니다.

 

원래 이쯤에서 끝마치려 했는데, 이번에는 생각보다 어려운 내용이 없어 진도를 더 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딱 외교만 해봅시다.

 

 

2. 조선 전기의 외교

 

조선 전기의 외교 정책을 4글자로 표현해 보라 하면 사대교린입니다.

 

사대라는 것은 큰 나라를 섬긴다. 교린은 이웃 ‘린’. 이웃과 교류한다. 여기서 큰 나라는 명나라입니다.

 

이웃에 해당하는 나라는 여진족이나, 일본 등등이 있겠네요.

 

 

 

[사대]

 

먼저 명나라입니다.

 

명나라는 초반부터 사이가 좋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는 명나라를 치자는 인물이 최영과 정도전, 2명이나 있었거든요.

 

최영은 이성계에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령하죠. 물론 이성계가 군을 돌려서 죽임을 당했지만요.

 

정도전도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면서 요동을 치자 하다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죽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태종 이방원 때 명과의 사대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합니다.

 

사대 외교라는 단어를 딱 들으면 사실 기분이 썩 좋진 않죠?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대 외교의 내용을 보면 그리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대는 기본적으로 공무역 시스템입니다. 상당히 실리에 입각한 시스템이죠.

 

사대 외교라고 우리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 명은 이걸 그냥 ‘허허, 그래 잘했다’ 하며 받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큰 나라로서 그에 대한 답례를 하는데 오히려 바친 조공보다 2배 많은 답례가 오곤 합니다.

 

 

약간 그런 거죠. 조선이 명을 상국이라고 모셨는데 조공을 똑같이 1:1 등가 해주면 명의 자존심이 상하는 꼴..

 

아무튼 사대를 통한 공무역 시스템은 오히려 우리가 이득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에서는 어떻게든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습니다.

 

사대를 맺은 국가여도 그 사대의 횟수를 늘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빈번하죠. 조선도 그랬구요

 

명과의 관계는 이 정도 기억하시면 됩니다.

 

 

 

 

[교린]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는 다 비슷합니다. 강경책과 온건책을 병행해서 사용하죠.

 

 

여진에 대해서 강경책으로 북쪽의 4군 6진을 개척합니다. 

 

실질적으로 세종이 이 지역을 개척하면서 지금의 한반도 모습을 갖추었다고 말씀드렸죠?

 

4군에는 최윤덕, 6진에는 김종서를 파견했다는 것도 한 번 상기시켜 주고요.

 

 

근데 4군 6진을 개척하면 땡인 게 아니라 관리를 하려면 그 지역에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관리를 못해 돌려줘야 하죠.

 

고려 시대에 윤관의 별무반이 동북 9성을 확보했지만, 관리를 못해 돌려준 거 기억나시죠?

 

그래서 4군 6진을 개척하고 관리를 위해 남쪽 지방 사람들을 강제로 이사시킵니다. 사민정책이라고 하죠.

 

 

그냥 이사시키면 불만이 많겠죠? 그것도 추운 북쪽지역인데.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해선 관찰사를 파견할 때도 상피제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지역 출신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거죠. 이런 모습을 통틀어 토관제도라 합니다.

 

토착민을 관리로 앉히는 거죠.  '너 그쪽 출신이야? 그럼 그냥 해' 이런 식입니다.

 

 

여진족에 대한 온건책으로는 한양에는 북평관, 북쪽 지역에는 무역소를 설치해 줍니다.

 

 

 

일본도 여진처럼 강온정책을 펼치는 모습입니다.

 

강경책 하면 세종이 대마도에 이종무를 보내 정벌을 하죠. 쓰시마 섬이라고도 합니다. 워낙 왜구들이 많았던 지역이라서요.

 

온건책으로는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교류면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일본과 가까운 3포를 개항해 줍니다.부산포, 제포, 염포의 3포 개항과 함께계해약조라는 조약을 맺습니다.

 

계해년에 여기를 열어줄 테니까 너희들 무역해라~ 이런 겁니다.

 

순서로 따지면 3포를 먼저 개항하고, 이를 명문화시킨 게 계해약조입니다.

 

세종의 당근과 채찍

 

여진과 일본에 대한 강온책은 모두 세종 때 이루어졌다는 점 기억해놓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전기 15세기의 외교정책. 사대교린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안정화된 15세기를 지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점점 말썽을 피웁니다.

 

우리가 명나라 와의 사대 횟수를 늘리려고 노력하듯, 일본도 우리와 조금 더 많은 교역을 원한 겁니다..

 

비록 15세기에 3포 개항을 해줬지만, 이 3포 이외에 더 많은 것들을 달라며 3포에서 난을 일으킵니다.

 

중종 때 일어난  3포 왜란입니다. 바로 이때 비변사가 만들어집니다.

 

비변사는, 대+ 변방 즉 변방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비하는 기관입니다. 변방이라면 여진, 일본 모두 포함이죠.

 

이때 비변사는 그냥 어떤 일이 터졌을 때 빠르게 봉합하기 위한 임시기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왜놈들이 명종 때는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킵니다.

 

을묘왜변이라 하는데, 명종은 을사사화, 임꺽정과 더불어 왜놈들까지 난동이니 안 되겠다 싶어서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합니다.

 

16세기 불안 불안하죠? 그러다가 결국 16세기 막판 1592년. 일오구 있을 수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2-1.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과정을 한번 살펴보죠. 일단 지도 볼까요?

 

임진왜란 지도

 

조금 정신없는데, 천천히 설명드릴 테니 흐름을 숙지해 봅시다.

 

우선 일본이 신무기 조총을 앞세워 급습합니다.

 

부산 바로 무너지고 동래도 뚫립니다. 동래성 전투는 그림으로도 남아있습니다.

 

동래부 순절도

 

그리고 충주에서 탄금대 전투까지 승리하며 쭉쭉 밀고 올라옵니다.

 

일본이 차례로 정복한 지역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달려옵니다.

 

충주의 신립 장군까지 패배하자 순식간에 수도로 가는 길이 뚫리죠.

 

 

선조는 결국 개성 – 평양 – 의주 순으로 계속 이동하며 도망 다닙니다.

 

백성들은 이를 보고 임금이 그렇게 도망을 가? 하며 화를 냈지만 왕이 잡히면 게임은 끝나기에 가긴 해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선조가 현대에도 악평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잡히면 안 되니까 피난 가는 것은 인정하지만, 피난을 갈 때 그 지역민들을 어떻게 할 건지 플랜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습니다.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보자 이거죠. 백성들을 내팽개친 모습..

 

 

이렇게 쭉쭉 밀리는 과정에서 드디어 승전보를 울리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죠.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뒤이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에서도 승전보가 올라옵니다

 

의주로 갔던 선조가 이 틈에 명나라에게 도와달라고 sos를 칩니다.

 

명은 흔쾌히 군사를 보내 조명연합군을 결성, 끝끝내 평양성 탈환이 조명 연합군에 의해 이뤄지게 됩니다.

 

북쪽의 평안도 지역에서 평양성을 탈환했다면 다른 여러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활약합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있다면 함경도 지역의 북관대첩. 정문부가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이끌며 적을 밀어냅니다.

 

의병에는 경상도 지역의 홍의 장군 곽재우, 전라도 지역의 고경명, 충청도 지역의 조헌 등등 의병들이 오히려 군 보다 든든한 모습.

 

임진왜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까지 치르고 난 뒤 잠깐의 휴전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래서 여기 있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 대첩이라고 얘기하죠.

 

 

 

2-2. 임진왜란 이후의 변화

 

이런 과정 속에 조선의 군사조직은 5위 영진군 체제에서 5군영 속오군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중앙군이었던 5위의 경우, 사람들은 의무병으로써 포를 내고 군을 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사력이 약해지고, 나라를 지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 이를 임진왜란을 통해 뒤늦게 심각성을 느끼고 개선합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훈련도감. 군인들의 구성을 의무병이 아니라 직업군인으로 바꿉니다.

 

의무병 신분인 백성들이 군대를 안 가는 대신 포를 내면, 그 포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직업 군인으로 고용하는 거죠.

 

포를 내고 뺄 사람은 빼고, 군사력은 군사력대로 증진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조총의 위력을 깨닫고 조선도 조총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그 이전에는 조선이 조총의 존재를 몰랐던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조총에 대한 평가는 '별 볼일 없다' 로 끝나있었습니다

 

왜냐면 조총은 한 번쏘면 약 1분의 탄약장전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때문에 조총을 큰 위협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비를 하지 않은 탓에 순식간에 조선이 밀린 거죠.

 

일본은 1분의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1,2,3열로 군사를 배치해 돌아가며 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조총 하나는 별거 아니지만 조총이 집단화되면 연발이 되면서 강력해지는 거죠.

 

 

 

조선은 조총의 위력을 너무 등한시한 것을 인정하고 훈련도감에서 조총 부대를 구성합니다.

 

조총을 쏘는 포수, 활을 쏘는 사수, 창을 쓰는 살수로 삼수병을 구성합니다.

 

이렇게 중앙군은 직업군인의 형태로 변하고 있구요, 지방군인 영진군도 마찬가지로 의무병인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양반부터 노비까지 전부 다 집합시킵니다.

 

이전에는 예비군으로써 훈련만 받고, 전시에만 잡색병으로서 투입되는 양반과 노비들이 이제는 지방군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죠.

 

이를 속오군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국방 문제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임시기구, 비변사가 상설기구화 되었다 했죠?

 

이 비변사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됩니다. 전쟁이 나면 국방부가 권한이 강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국정에 관한 모든 것을 비변사에서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의정부 6조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게 됩니다.

 

전쟁이 준 변화의 모습은 이 정도로 기억해 놓으시면 되겠습니다.

 

 

임진왜란의 폭풍 같은 전투들이 지나가고 휴전이 찾아온 것도 잠시, 다시 정유재란이 터집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한 편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중간에 휴전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면 될 거 같습니다.

 

2-3. 정유재란과 그 이후

 

정유재란 때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싸움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있겠죠.

 

영화로도 나왔는데 보셨으려나요?

 

13척의 배를 갖고 수백 척의 왜선을 격파한 전설적인 전투.

 

명량은 울돌목입니다. 물살이 빠른 지형적 특징을 이용하여 그냥 박살을 내버리죠.

 

당시 우리에겐 조총 같은 무기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무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해상 전투에서 갖는 강점은,  빠른 배를 이용해 순식간에 접근한 뒤 상대의 배 위에 넘어가 제압하는 전투 스타일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장점은 포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순신은 배를 붙이지 않고, 절대 백병전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합니다.

 

무조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포를 때리죠.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노량 전투에서 결국 전사하는 모습.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러면서 1592년 출발했던 7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되는 모습들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대외적인 변화가 어떻게 있는지 한 번 봅시다.

 

 

명나라는 조선에 조 명 연합군을 지원해 주는 과정 속에서 굉장히 쇠퇴합니다.

 

동시에 만주 쪽에서 성장하고 있던 여진족이 후금이 됩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에도막부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학자와 도자기 기술자를 끌고 가면서 도자기 산업과 성리학이 굉장히 발달하게 되죠.

 

그런 일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어서면서 ‘나는 임진왜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와 교류하자’ 라고 말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될 정도로 조선에 큰 피해와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쟁은 이런 겁니다. 한 시대의 성격을 바꿔버리죠.

 

임진왜란 때 선조가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향하는 피난길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합니다.

 

이후 광해군이 왕위로 올랐을 때 한 일 중 중요한 것은 국제정세와 관련해서 살펴야 합니다.

 

임진왜란 결과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성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명과 후금이 싸우네?

 

명나라가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물론 사람 대 사람이라면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주는 게 맞습니다만, 국가 대 국가의 경우에는 말이 다릅니다.

 

과연 해당 결정이 국익에 부합한 건지 검토해보아야 하죠. 그래서 광해군은 군대를 보내긴 보내지만 군대장 강홍립에게 명령합니다.

 

적당히 때를 살피라고요. 과연 우리가 우리 군사를 다 죽여가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인지 판단하라는 얘기죠.

 

결국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합니다.

 

그러자 당시 유학자들은 난리가 납니다.

 

임진왜란 당시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나라가 멸망할 뻔한 조선을 다시 세워준 나라가 명나라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냐 말이죠.

 

 

또 광해군은 왜란으로 인해 끊어졌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재개합니다.

 

세종 때 3포 개항과 함께 맺었던 계해약조처럼 광해군도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었습니다.

 

 

광해군은 이런 실리 외교뿐만 아니라 국내 정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합니다.

 

특히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내라는 겁니다.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또 전쟁 직후다 보니 아픈 사람이 많을 거 아닙니까.

 

백성들을 위해서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을 편찬하죠.

 

 

그런 과정 속에서 광해군이 보여준 도덕적 결함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생 영창대군을 증살이라고, 쪄서 죽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비시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과, 명을 도와주지 않는 ‘명분에 맞지 않는 외교적 선택’을 탄핵 사유로 보고 서인들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합니다.

 

 

그런데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은 본디 쫓겨난 세력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혼란하니 미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시키자고 서인 '정철'이 왕에게 건의하자, 오히려 밀려났었죠.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제야 선조는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겁니다.

 

 

이 광해군과 함께 움직였던 당은 북인당, 하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북인당을 포함한 광해군을 축출하자 다시 서인당이 집권하는 거죠.

 

붕당의 약도가 어렴풋 기억나시죠? 헷갈리신다면 다시 보면 됩니다.

 

붕당 분화 과정

 

권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당명백히 친명 배금 정책을 시행합니다.

 

명과 친하게 지내고 금을 배척하는 것인데, 인조반정 이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중심이 돼서 인조를 흔들기도 합니다.

 

논공행상이란 '공을 따져 상을 준다' 즉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만큼 권력을 준 것인데, 이괄은 공에 비해 적게 받았다며 난을 일으킨 거죠

 

이괄의 난 때문에 인조가 공주까지 피신을 갈 정도로 영향을 줬습니다.

 

 

이렇게 뒤숭숭한 모습이 나타나는 와중, 친명 배금 정책을 취한 조선을 후금이 괘씸하게 여겨 공격합니다.

 

 

 

3. 후금의 공격

 

[정묘호란]

 

정묘호란 당시에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갈 정도로 또 밀립니다.

 

결국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맺기로 마무리 짓고 어찌저찌 전쟁을 끝내죠.

 

하지만 조선은 이를 이행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라고 해도 보내지도 않고 누굴 보내라고 하면 가짜 사람을 보내고 이런 식으로 배 째 운영을 합니다.

 

그래서 후금은 또 쳐들어옵니다.

 

 

[병자호란]

 

이땐 후금이 아니라 입니다. 나라 이름이 바뀐 거죠.

 

이러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갑니다.

 

왜 강화도로 안 갔냐면 저번 정묘호란 때인조가 강화도로 피란 갔던 걸 보고 청나라가 다시 못 가도록 막아놨습니다.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47일간의 항전을 치르는데 싸움에 집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이때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헌과 최명길

 

 

이 이야기는 조금 외전이지만, 꽤 재미있고 교훈적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상헌은 명과의 의리를 버리고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끝까지 싸우자 주장합니다.

 

최명길은 반대로 고통받는 백성을 생각하고, 청과 화해하여 전쟁을 멈추고 나라를 보존하자 주장합니다.

 

조정 대신들이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갈등하던 인조는 왕실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항복을 결심하죠.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 초안을 찢어버리지만 최명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 찢어진

항복 문서 초안을 다시 이어 붙여 청에게 갖다 줍니다.

 

이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었지만, 오히려 최명길은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들어야 했습니다. 

 

사실 위기를 맞아 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준 건 최명길이었는데도 말이죠. 

 

청군이 들이닥칠 때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가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을 벌어준 이도 최명길이고, 항복 현장까지 끝까지 함께한 이도 최명길이었습니다.

 

청이 쳐들어오기 전으로 돌아가면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이이와 성혼의 학문을 공부한 서인 계열의 선비로, 백사 이항복에게 같이 학문을 배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국난이 일어나 첨예하게 대립하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뜻을 같이하던 사이였습니다.

 

남한산성에서의 충돌 이후 최명길과 김상헌은 서로를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로 여기지만..

 

둘은 1640년 겨울, 다시 청나라 심양 감옥에서 만나게 됩니다. 

 

최명길은 명나라와 은밀히 내통하며 물자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청나라가 알게 됐기 때문에 잡혀왔고

 

김상헌 또한 계속해서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김상헌을 잡아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로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감옥에서 만난 둘은 결국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은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랜 의심을 거두고 화해한 두 사람이 나눈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답은 함께 옥에 갇혀 있던 이경여를 통해 조선까지 전해져 당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이야기로 남아 우리에게 교훈을 주네요.

 

아무튼 병자호란 때 결국 끝까지 싸우지 않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를 거쳐 항복을 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며 병자호란이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선조는 청과의 외교도 거치고,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도 합니다.

 

 

 

 

다음 글부터는 중국과 일본과의 큰 두 전쟁을 겪고 난 뒤의 조선 후기를 살펴보죠.

 

물론 후기로 넘어가기 전에 여태 그래온 것처럼 조선 전기의 문화를 살펴보고 넘어가야겠죠? 

 

꽤 분량이 많았는데, 키워드 정리로 복기하면서 끝내봅시다. 흐름을 타시면 편하게 한국사가 몸에 체득되실 겁니다.

 

 

중앙 집권화
중앙 : 의정부, 6조 지방 : 8도 일원화
왕권 강화 왕권 견제 중앙의 영향 행사 사림의 성장
6조 직계제 ( 태종, 세조 )
승정원
의금부 ( 금부도사 파견 )
의정부 서사제 ( 세종 )
[3사] - 언론 기능
사간원 - 간쟁
사헌부 - 감찰
홍문관 - 경연
양사 - 사간원 + 사헌부, 관리 서경권
8도 관찰사 파견
부목군현 수령 파견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
유향소를 견제하는 경재소

유향소 - 여론 형성 기관
서원 - 교육 + 제사
향약 - 농민통제
그외 : 한성부, 춘추관, 장례원, 성균관

 

 

관리 선발 방식 군사 조직
[과거]
문과 - 양인 이상 응시, 서얼과 재가한 부인의 아들은 X
무과o 잡과o 승과x 

천거 - 관리 추첨제, 현량과 ( 조광조 )
문음 - 고위 관료는 불가능
취재 - 기술직
          
기본적으로 의무병 기반

중앙 : 5위
지방 : 영진군

임진왜란 이후 

중앙 : 5군영 - 훈련도감 삼수병 배출
지방 : 속오군

 

사대교린
15세기 16세기 ( ~ 1592 )
[명]
최영, 정도전 - 요동 정벌 주장
태종 - 명과 사대 시작, 공무역 시스템

[여진]
강경책 : 4군6진 - 사민정책, 토관제도 실시
온건책 : 북평관, 무역소 설치

[일본]
강경책 : 이종무 쓰시마 섬 정벌
온건책 : 3포 개항 ( 부산포 제포 염포 ), 계해약조
3포 왜란 - 중종, 비변사 설치 ( 임시 기구 )
을묘왜변 - 명종, 비변사 상설기구

 

임진왜란 과정 임진왜란 결과
동래성전투 - 송상현
탄금대전투 - 신립
한산도대첩 - 이순신
진주대첩 - 김시민
평양성탈환 - 조명연합군
북관대첩 - 정문부
행주대첩 - 권율

광해군 세자 책봉

정유재란

명량대첩, 노량해전 - 이순신
[광해군]
대동법 시행
허준 동의보감 편찬
일본과 국교 재개 ( 기유약조 )
명의 도움 요청에 미온적 반응 ( 중립외교)
강홍립 군대 후금에 투항
영창대군 증살, 인목대비 폐위

[인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축출, 서인과 권력 장악
이괄의 난 ( 논공행상 불만, 인조의 공주 피신 )
실리외교 x 친명 배금 정책 실시
일본에 통신사 재파견

군사 제도 정비 - 5군영 속오군
비변사의 권력 강화, 의정부 6조 약화

 

후금 (청)
정묘호란 ( 후금 ) 병자호란 ( 청 )
인조 정권의 친명 배금 정책에 침략

인조 강화도 피난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음으로서 종쟁
조선의 불성실한 형제관계 이행으로 침략

인조 남한산성 피난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 인조의 투항

삼전도 항복 ( 삼배구고두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