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시작에 앞서
이번 글에서 배울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 물론 매끄러운 설명을 위해 전기의 내용이 살짝 포함될겁니다.
이미 익숙하신 내용일테니 복습 + 후기를 배우는 느낌으로 가봅시다.
경제와 사회는 특히나 조선 전/후기의 차이가 명확한 부분인데요. 아는거 절반, 새로운거 절반이니 편하게 읽어봅시다.
1. 경제
우선 경제하면 수취제도와 토지제도가 있죠? 다행히 토지 제도는 수조권이 소멸함에 따라 (과전법의 실시) 볼게 없습니다.
1-1. 수취제도
수취제도는 이제 너무나 익숙합니다. 조세 공납 역이 있죠.
조세의 경우, 전기에는 농작물에 기반하여 내는 과전법. 1결당 30두가 최대죠
그러다 세종 때 더 정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하여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의 공법으로 바꾸었죠?
하지만 너무 복잡하여 임진왜란 이후 인조 때에는 최저세율인 1결당 4두를 일괄적으로 적용한다는 것까지 배우셨습니다.
공법이 좋기는 한데 너무 복잡하다 이거죠. 이걸 영정법이라고 합니다.
근데 이미 영정법을 실시하기 전에도 후기로 넘어갈때 쯤, 1결당 4두를 관행적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인조 때 영정법이라고 못을 박은 거죠.
또 다른 세금 중 하나가 공납.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제도인데, 특산물 제공이 정말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대신해주는 사람이 누구였다? 방납업자죠. 이 방납업자가 수령과 결탁하여 방납의 폐단이 벌어지는 모습까지 했습니다.
이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게 광해군의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쉽게 ‘많이 가진 자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라’ 입니다.
대동법을 제정하면서 공납은 특산물이 아니라 1결당 12두를 내도록 바꾸었습니다.
1결이 토지의 단위니까,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내라는 소립니다.
A: 그럼 평범한 농민들도 더 많이 내게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죠. 조선시대 땅의 소유자는 대부분 양반이었고, 상민들은 대부분이 양반들에게 땅을 빌려 그들에게 지대를 내는 형태였습니다.
그럼 결국 대동법은 민생안정에 효과적이겠죠? 땅이 없으면 낼 돈이 없으니까요.
많이 가진 부자들에게는 증세지만 적게 가진 가난한 사람한테는 감세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땅을 가진 양반들, 기득권층은 당연히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법을 만드는 사람이니 그들이 손해 보는 제도는 쉽게 적용되지 않겠죠.
그래서 대동법이 시행될 때, 경기도에서 출발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자그마치 100년이 걸립니다.
자 그럼 조세는 원래 쌀을 내는거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공납도 쌀을 내는 걸로 바뀌었네요?
임금이 쌀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까 국가 소속의 상인, 공인이 등장합니다. 과정을 너무 줄였나요?
임금은 예전처럼 각지에서 올라온 특산물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동법으로 1결당 12두를 거두는 곳이 선혜청이었습니다.
이 선혜청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가지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구입하는 상인이 등장하는거죠.
즉 공인은 대동법을 통해서 등장한 상인이라 보시면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중요한 건, 이 공인들이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걸 사니깐 사들이는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즉 대동법을 시행함에 따라 공인이 등장하고, 공인이 등장함에 따라 시장에 돈(쌀)이 풀어지고, 더 많은 물건이 생산되는 겁니다.
이때부터 경제가 상품 화폐 경제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화폐의 통용은 아직이지만 쌀이 화폐로써 사용되고 있는 모습.
사람들은 이때부터 물건을 자급자족, 내가 쓰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팔기 위해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근대화로 갈 수 있는, 자본주의로 갈 수 있는 싹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죠.
역에는 군역과 요역이 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200년 동안 전쟁이 없다 보니 요역화가 심해진다고 했습니다.
군역이란 훈련이고, 요역이란 노동인데, 요역화가 심해지니 군대 가서 중노동하는 것 보단 값을 지불하고 빼려는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보내는 대립이나, 아예 나라에 포를 주고 안 가는 방군수포 현상이 증가하죠.
근데 수령들이 역에 대해서도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하자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합니다.
원래 전기의 방군수포에서 1년당 2 필을 내는 반면 균역법은 획기적으로 50%를 절감한 1년에 1 필이죠.
근데 이건 대동법처럼 부자들에게 더 거둬들이는 그런 제도가 아니니, 50%의 펑크난 세금을 복구해야겠죠?
어장세, 염세, 선박세, 선무군관포와 같은 세금을 물리기 시작합니다.
A: 그럼 비리를 잡아도 새로운 세금이 등장했으니 결국 백성들이 힘든 건 매한가지 아닌가요?
세금목록이 늘어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가난한 농민들이 내는 세금은 줄어듭니다.
어장세는 어획, 염세는 소금, 선박세는 배가 왔다 갔다 할 때 내는 세금인데, 사실 이런 것들은 주로 왕족들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원래는 왕족들은 이런 부분에 있어 완전히 면세였죠. 그 말은 곧 뭘까요?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하면 1년에 1 필로 줄어드니 줄인 만큼 보충을 해야 하는데 백성들에게만 부과하지 않겠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내 돈을 내겠다 이겁니다.
어장세, 염세, 선박세는 99%가 왕족이 내는 세금이거든요. 그럼 선무군관포는 뭘까요?
이건 백성 중에서도 돈많고 할거 없는 사람들에게 걷는 겁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농상공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등장하거든요.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과 임명장을 줄 테니 세금을 조금 더 내. 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부담이 없겠죠?
그렇게 가다가 아무래도 1포가 줄어든 게 크다 보니, 아예 토지에 세금을 또 매깁니다.
아까 말했듯 토지의 소유자는 대부분 양반이기에 민생에는 타격이 없습니다.
1결당 2두를 추가로 정하죠. 이거를 결작이라고 합니다.
근데 조선 후기의 조세, 공납, 역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보이시나요?
영정법 1 결 4두, 대동법 1 결 12두, 결작 1 결 2두 모두 토지에 기반한 세금입니다.
물론 역에서는 1년에 1 필씩 포를 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결을 기준으로 세금을 내는 모습이네요.
그렇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전세화 현상이 나타나네요. 세금이 토지에 집중된다는 말입니다.
당시는 쌀이 곧 화폐이고, 돈입니다. 그래서 쌀을 내라는 것은 돈을 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죠. 이를 금납화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수취제도의 특징 두 가지, 전세화/금납화 기억!
| 전기 | 후기 | 수취제도 전세화 금납화 |
|
| 조세 | 과전법 (1결 30두) 공법 (전분 연분, 1결 4~20두) |
영정법 (인조, 1결 4두) | |
| 공납 | 특산물 - 방납의 폐단 | 대동법 (광해군, 1결 12두) -선혜청 -공인 등장 ( 상품 화폐 경제) |
|
| 역 | 군역 감소, 요역 증가 -대립, 방군수포제(1년 2필) 성행 |
균역법 (영조, 1년 1필) -어,염,선박세 -선무군관포 -결작 실시 (1결 2두) |
1-2. 농업
근데 왜 이제서야 특산물과 포를 쌀로 내게 된걸까요? 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진 다 특산물과 옷감울 냈는데 말이죠.
방납의 폐단, 가난한 백성들의 갱생 등도 이유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궁금하시죠?
바로 농업의 발달입니다.
밭농사, 논농사로 나누어보면 먼저 밭, 조선 전기에는 2년 3작이 아주 일반화되었다고 했습니다.
근데 이제 후기로 가면 아까 공인 얘기할 때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 농작물을 심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인드가 어렴풋 자본주의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작물들을 농작물이 아니라, 돈을 번다하여 상품작물이라고 하죠.
이 상품작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면 담배, 인삼, 면화 등등이 있습니다.
특히 정조가 담배를 엄청 좋아했었죠. 똑똑한 왕 기억나시죠?
정조는 담배를 한 모금해보곤, ‘아니, 이 좋은 걸 왜 안 피워?’ 하며 온 백성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논농사로 넘어가서, 조선 전기만 해도 씨를 직접 뿌린다 하여 직파법이 유행했습니다.
사실 직파법 말고도 고려 말기로부터 이어진 이양법도 있었죠. 조금 지난 글이라 기억나실련지 모르겠지만요.
이양법은 고려 말기에는 남부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고 있을 뿐이지, 막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양법이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데요, 이 이양법 때문에 전/후기의 경제,사회가 송두리째 변합니다.
우선 이모작이 가능해집니다. 벼를 심고 그다음에는 보리를 심는 등 1년에 두 번 농사를 지을 수 있죠.
그리고 이양법이 일반화되면서 5명이 할 일을 1명이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양법이 뭐길래 이렇게 획기적이냐면, 농사는 피와의 싸움이거든요. *Blood 아니고 잡초입니다.
근데 잡초와 벼가 있으면, 정말 똑같이 생겨서 벼알이 열리기 전까지는 이게 벼인지 피인지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이 피를 미리 뽑아두지 않으면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어서 벼알이 잘 안 열려요. 즉 생산력이 확 떨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이 피를 뽑아야 하는데 이양법이 확산되기 전엔 매우 힘들었습니다.
직파법은 이름부터 씨앗을 뿌리는 농사법이잖아요. 어디가 잡초고 어디가 벼인지 알아내는게 일의 80% 였습니다.
하지만 직파법과 달리 이양법은 줄을 맞춰 벼를 심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그 라인 밖에 있는 건 다 피인 거죠. 줄밖에 있는 것만 뽑으면 끝이니까 얼마나 간단합니까. 소요되는 노동력이 확 감소됩니다.
즉 이양법이 시행되면서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소요 노동력을 감소시키게 됩니다.
이 이양법이 조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이양법의 두 이점에 근거하면, 이제 같은 토지에서 나오는 쌀의 양이 이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혹시 여기서 스쳐 지나가는 거 없나요? 조선 후기에 세금을 주로 토지에 매기고 있다. 즉 전세화 되고 있다 했죠?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 공통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 이유가 바로 이양법의 확산인겁니다.
땅에서 쌀이 비약적으로 많이 나오니, 세금도 토지에 집중해서 물리고 있는 거죠.
예전까지만 해도 땅에서 나오는 쌀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특산물도 걷고, 포도 걷어서 양을 맞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쌀만 왕창 가져가도 남게 되는거죠.
조선 후기 농업의 변화와 수취제도의 변화 간 상호관계를 이해해두시면 좋겠죠?
이제 농업 쪽에서 더 봅시다.
조선 전기, 소작농이 땅의 주인에게 수확물 절반(지대)을 내던 타조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해 농사지어서 100 가마 나오면 소작농 50 가마, 지주 50 가마 나눠먹었죠.
근데 이게 조선 후기에 오면서 좀 독특해집니다. 지대의 개념은 물론 유지됩니다.
도조법이라고, 도박을 하는 제도가 등장합니다.
타조법은 농사를 다 짓고 난뒤 수확량에 의해 지대가 결정났죠?
도조법은 농사를 짓기 전에 소작농이 지주에게 딜을 하는 겁니다.
‘작년에 100 가마 나와서 50 50씩 나눴는데, 올해는 당신에게 60을 드리리다’ 하는 거죠.
당연히 지주는 좋아죽습니다.
타조법을 쓸땐 수확량에 따라 지주의 몫이 달라지므로 농사를 지을 때 이 소작농을 달달 볶아야 합니다.
‘빨리 일어나 이놈아! 어서 일해!’ 이러면서요.
이 관계는 더욱이 지주 대부분이 양반이고, 소작농 대부분이 상민이라 도드라졌습니다. 신분제적 성향이 강한거죠.
근데 도조법으로 계약하면 양반 지주가 소작농에게 달달 볶을 필요가 없는겁니다.
농사가 망하든 말든 정해둔 가마만 받으면 오케이니까요. 즉 신분에 의해서 소작농을 압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타조법과 도조법의 차이는 이거죠. 신분에 의한 간접적 상하관계의 유무.
도조법의 등장으로 신분의 관계가 아닌, 계약의 관계로 발달하는 겁니다.
점점 신분 사회가 해체될 기반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근대화론이 허구임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완전 복습인데,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책, 농서가 필요하겠죠?
조선 전기 농서 하면 세종 때 나온 농사직설, 성종 때 나온 금양잡록등이 있었다면
조선 후기가 되면 이모작 이런 것들을 자세히 수록하기 위한 농가집성이라는 농서가 있고요
그다음 상품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색다르게 경작할 수 있다 하여 색경, 이런 농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튼 농업 파트의 핵심은 바로 이양법입니다. 이양법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후기 경제 시스템 변화. 잘 기억해 두고 넘어갑시다.
이양법의 뒤에 서술할 상업에까지 큰 연관이 있기에 계속 만나게 될 겁니다.
| 농업 | 전기 | 후기 |
| 논 | 직파법 이양법 (남부 일부 지역) |
이양법 (전국 확산) -이모작, 광작 가능 -생산력 증가, 투입 노동력 감소 |
| 밭 | 2년 3작 | 상품작물 (담배, 인삼, 면화) |
| 지대 | 타조법 (1/2) (신분적 관계) | 도조법 (계약적 관계) |
| 농서 | <농사직설> <금양잡록> | <농가집성> <색경> |
1-3. 상업
이양법을 통해 농업 생산량이 뛰어나게 증가했으면, 남는 게 생기겠죠?
농업 잉여물이 생기면서 교환 행위가 활발해지게 됩니다. 당연히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일단 상인들을 나누어봅시다.
국가의 허락을 받아서 일하는 관허상인 / 개인적으로 상업하는 사상
그리고 조선 전기만 해도 경제 정책이 중농억상이라 했었습니다.
왜? 전기는 성리학자들이 정권을 꽉 잡고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명분과 염치를 중요시 여기죠.
근데 장사할 땐 약간의 거짓말이 들어가잖아요. '아이, 그냥 가져가요. 나 손해 보는 건데 그냥 주는 거예요' 이런거요.
당연히 장사에서 그런 일은 없죠. 누가 손해 보면서 장사합니까? 성리학자들은 이런 걸 군자의 모습이 아니라면서 싫어합니다.
반면에 농업, 얼마나 정직합니까? 노동력이 투여되는 만큼 딱딱 나오잖습니까.
그래서 성리학자들이 신분을 나눌 때, 사농공상 이라 하여 농업 하는 사람이 둘째에 옵니다.
물건 만드는 사람이 세 번째, 물건 파는 사람이 네 번째에 오네요. 조선 전기 지배층의 관점이 이러했으니 말 다했죠.
정리하자면 조선 전기에는 후기의 이양법처럼 상업이 발달할 기반도, 상업에 대한 국가의 장려도 없으니 발달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기 당시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만을 해결해 주는 상인만 활동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상인이 바로 시전상인들이죠. 종로에서 활동하는 시전상인들은 특허를 받아 자신들만 물건을 팔 수 있었죠.
시전상인하면 금난전권이 떠오르실텐데, 지금은 전기로 아직 이들에게 금난전권이 없습니다.
시전상인들 외에는 종로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다음 또 보부상이라고 지방 장시를 오고 가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봇짐을 지고 다녀서 보부상이라 하는 겁니다. 시전상인과 보부상 모두 국가에서 공인한 상인이었습니다.
즉 상업을 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선 전기의 모습.
이들 보부상들은 조선 후기는 아니지만 전기의 나중에, 혜상공국에 소속돼서 보호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부상들이 따로 만들었던 단체, 황국협회는 나중에 시간이 흘러 개항 이후,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데 앞장서는 역할도 하죠.
이는 나중에 개항기의 갑신정변 때 자세히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조선 전기의 관허상인은 시전상인과 보부상! 그리고 조선 후기의 관허상인은 공인이라고 저~ 앞에서 얘기했었죠?
대동법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상인이죠. 국가로부터 쌀을 받아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사는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가 되면 시전상인들이 이때 금난전권이라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종로에도 여러 상인 들어서니까 오히려 국가 공인의 시전상인들이 돈을 못 버는 겁니다.
심지어 시전상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서 장사 권리를 받고 상행위를 하는 건데 이들은 세금도 안 내면서 막 와서 장사하는 거죠.
그래서 리어카 끌면서 난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리, 금난전권을 가지게 된겁니다.
근데 이 금난전권은 얼마 안 가 정조 때 폐지가 됩니다. 기억나실까요? 바로 신해통공입니다. 신해년에 통공 한다.
내용은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시전상인의 전기와 후기 변화를 봤고, 보부상들은 후기로 가면서 전국적 유통망을 갖추게 된다는 것 정도 알아두시고 넘어갑시다.
관허상인은 끝! 이제 사상 한번 봅시다.
조선 전기 없습니다~ 국가가 허락하지 않으면 물건을 팔 수 없었죠. 바로 후기로 건너뜁시다 ㅎㅎ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많은 상인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한강 경강상인 등 대표적인 사상이죠.
이들은 사상이 아니라 거상이라고도 했습니다. 돈을 워낙 크게 크게 다뤄서요. 중국 부자 느낌..?
사상들이 보이기만 하면 바로 조선후기구나~ 하시는 됩니다.
거상 중에서도 개성의 송상들은 제일 돈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죠.
자기들끼리 돈 계산하는 법도 만들고 전국에 송방이라 하는 지점망까지 만듭니다. 지금의 GS CU처럼요.
이렇게 엄청난 돈을 가진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면서 중계업과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숙박업 등이 발달합니다.
중개업을 담당하는 객주, 숙박업을 담당하는 여각 등이 등장하죠.
특히 바다를 건너 거래하던, 배를 타는 사상들은 선상이라 하죠.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선상들이 배를 대는 그 포구의 모습을.
여러 사상들이 바글바글한 객주, 그리고 왁자지껄 정신없는 여각!
사상에는 아까 얘기한 종로에서 난전을 펼치는 영세 상인들도 있습니다
관허상인인 공인과 시전상인, 그리고 사상 중에서도 거상들을 엮어 독점적 도매상인, 즉 도고라고 불렀습니다.
돈이 너무나 많아서, 그 돈으로 물건을 싹 쓸고 다시 파는 모습을 보이죠.
박지원의 한문 소설 <허생전>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그 모습을 아주 잘 아실 겁니다.
관허상인과 사상들의 활동영역은 지도로 한번 봅시다.

개시, 후시는 설명을 안드렸는데 국가 내 상인들 간의 거래를 후시, 국가 간의 공식적인 사절단 간의 무역을 개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상인들이 엄청나게 활동하는 조선 후기의 모습.
그런데 거상들은 쌀 500 가마, 비단 100포 등등 거래의 규모가 아주 클텐데 이걸 어떻게 운반합니까?
상업이 발달하자 점점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고, 숙종때 상평통보가 유통되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조선 전기에는 상업이 많이 발달 안 하니까 화폐가 잘 통용되지 않겠죠.
화폐라는 것은 교환이 활발할 때 그 교환이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조선 전기, 고려 시대에는 화폐의 통용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유통에는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근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니 드디어 화폐가 유통되는겁니다.
화폐가 유통되니까 너무 편합니다. 옛날에는 창고에 쌀 쌓아두면 그게 계속 갑니까?
쥐들이 막 갉아먹죠.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하기도 하고요.
근데 당시엔 화폐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죠. 쌀이 곧 화폐니까요. 하지만 상평통보가 통용되면서 그런 걱정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이점도 얻는 동시에 문제도 발생합니다.
창고에 쌀을 가득 쌓아두던 사람들이 화폐가 통용되자 모두 돈으로 바꾸려고 하니 화폐를 굉장히 많이 찍어냅니다.
그런데 이 쌀과 화폐를 바꿔간 사람들이 쓰려고 바꾼 것이 아니고 그저 보관이 용이하도록 바꿔간 것이라, 여전히 쌀 쌓아두듯 돈을 쌓아두는겁니다. 공간도 줄이고, 쌀 관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죠.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돈을 무지막지하게 찍어냈는데 시중에는 돈이 없는 겁니다. 그런 현상을 전황이라고 하죠. 돈 전, 마를 황
근데 조선 후기의 수취제도는 금납화라 했죠? 근데 돈이 없으니까 어떡합니까. 돈을 확보하기 위해 쌀을 싸게 내놓는 겁니다.
쌀뿐만이 아니고 팔 수 있는건 뭐든지요. 화폐 가치가 올라가고, 물가는 떨어지네? 이건 바로 디플레이션 현상이죠.
인플레이션의 반대입니다. 조선 후기의 상업의 대략적인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지시죠?
이제 수공업과 광업만 살펴보고 경제파트는 끝내겠습니다.
1-3. 수공업, 광업
수공업과 광업도 상업처럼 이양법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쌀 생산량의 증가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하죠.
조선 후기에 이양법의 영향이 안 미친 곳이 없죠?
먼저 조선 전기는 마찬가지로 복습입니다. 이미 다 보셨던 거예요.
수공업과 광업처럼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이 조세 공납을 내는 걸 자신들이 만드는 물건으로 대체합니다.
자신의 영역, 관영과 합쳐서 관영수공업자라고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광업자들도 관영광업자.
그럼 역은요? 공업자들도 백성들처럼 군대를 빼기 시작합니다.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일어나서 대립과 방군수포가 성행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시죠.
임진왜란 이후 모병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부역제가 해이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가 전기고, 임진왜란 이후 역시 수공업, 광업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이 흐름부터 다시 봅시다. 이양법의 발달 – 농업생산량 증가 – 상업 활성화
쌀과 화폐의 시장보유량 증가로 상업이 활성화되려면 물품도 그에 상응하도록 대량생산해야겠죠?
거래만 활발하면 물건이 부족할 거 아닙니까. 돈이라는 통화가 있으니까요. 무한해서 상품을 만들어내야하죠.
이해가 안되시는 분들을 위해!
화폐 통화량 증가 = 화폐로 상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구입자 증가
이때 만약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화폐의 가치 저하 + 상품의 가치 증가 = 인플레이션
쉽죠?
농민들이 조선 전기에는 먹고살기 위해 농사하고, 후기에는 팔기 위해 상품작물들을 재배하는 모습을 보인 것처럼
이 수공업자, 광업자들도 팔기 위해서 물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민영수공업자라고 합니다.
특히 이때 선대제라는게 생겨서 거상 같은 돈 많은 사람들이 민영수공업자에게 돈을 미리 주고 상품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한번 답해봅시다. 이 선대제 시스템 속에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일까요?
바로 수공업자들이 상인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형태겠죠. 가격결정권을 상인들이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점점 수공업자들이 물건을 워낙 많이 만들게 되면서 독립수공업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만들어서 파는 거죠.
마치 공장과 같죠?
그리고 이렇게 물건을 많이 만들다 보니 연료도 많이 필요하겠죠. 농업, 상업,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광업도 발달하게 됩니다.
민영광산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거죠. 뿐만 아니라 은이 중국과의 무역 수단으로 최고여서 은광 개발도 활성화됩니다.
이를 설점수세제 라고 합니다. 풀어서 말하면 설치한다 / 점을 / 낸다 / 세금을
그냥 광산을 설치하고 세금을 낸다 이 소립니다.
근데 이게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다 광업으로 몰리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농민들이 농사 안 지으면 망하죠? 그래서 국가는 광업을 금지시킵니다.
하지만 돈 맛을 이미 본 사람들이 그만 둘 리가 없죠, 몰래 채굴하는 잠채 현상이 흔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걸 보고 국가는 아예 금지시키면 역효과가 나는구나. 싶어서 일부 허용해줍니다. 광업을 허락받은 이들을 덕대라고 합니다.
덕대는 일종의 CEO 느낌인데, 당시 상업이 많이 발달하니까 돈이 많은 거상들이 있겠죠?
그 거상들이 노는 돈을 덕대에게 주면서, 돈을 굴리라 시킵니다.
그럼 덕대는 국가로부터 허락받은 광산에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죠.
A: 그럼 결국 농사하는 사람들 일부가 광산에 일하러 가는 거니 국가가 좋지 않게 볼 거 같은데요?
이걸 설명하려면 앞의 이양법을 다시 꺼내야 합니다. 이양법이 워낙 효율적이라 5명이 할 일을 1명이 한다고 했었죠?
그럼 4명이 논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덕대가 그들을 불러 모으는 거죠.
이렇게 조선 후기로 가면 농업자, 수공업자, 광업자에 이어서 노동자가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점점 우리 사회와 닮아가죠?
이런 모습들이 전부 일제의 사관학자들의 말에 반박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못 이뤄냈다고 말하죠.
하지만 오히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이러한 조선 후기 자본주의의 싹이 발달하여 더욱 나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가 행한 근대화는 철저히 일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식민지 근대화였거든요. 기형적이고 종속적인 형태였죠.
여기까지 조선 후기의 경제였습니다.
사회를 이어서 하기전에, 표를 보면서 잠깐 스스로 정리하고 넘어가죠!
| 상업 | 전기 (중농억상) | 후기 (공인,거상 = 도고) |
| 관허상인 | 시전상인 (종로) 보부상 (지방 장시) -혜상공국, 황국협회 |
공인(대동법) 시전상인 금난전권 획득 정조의 신해통공, 금난전권 폐지 보부상의 전국적 유통망 |
| 사상 | 거상, 객주, 여각, 난전(영세상인) | |
| 화폐 | 상평통보 (숙종) | |
| 수공업 | 관영수공업자 | 민영수공업자, 독립수공업자 선대제 실시 |
| 광업 | 관영광업자 | 민영광산 개발 (특히 은광) -설점수세제 덕대의 등장, 광산 노동자 고용 |
이제 경제는 아예 끝! 사회로 가봅시다.
2. 사회
사회는 전기의 15,16세기를 지나 쭉 가서 19세기 사회를 볼 겁니다.
왜 훌쩍 뛰냐고요? 전기의 사회와 큰 변화점이 보이는 시기가 19세기부터거든요.
우선 분기점 때 일어난 왜란, 호란의 양난이 일어난 뒤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기본적으로 전쟁이니까 토지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양안이 다 불타 없어집니다.
세금을 걷어야 하는 정부로서는 황당한 일이죠. 토지를 누가 얼마만큼 가졌는지 알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호적도 불타 없어집니다. 데이터가 싹 날아가버려 사람이 몇 명인지 조차 파악을 못 합니다.
당연히 국가재정은 휘청이겠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합니다.
곡물을 납부하면 임명장을 주는 거예요. 대표적인 게 공명첩이죠. 비어있을 공, 이름 명, 즉 이름이 비어있는 임명장입니다.
이 납속책을 통해서 양반직을 팝니다. 원래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조선 사회가 움직이고 있었잖아요.
근데 실제로 공명첩을 샀다고 바로 흠흠 거리는 대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명예직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어쨌든 양반이니까 엄청난 혜택이 있겠죠. 양반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군역면제.
비록 명예직이지만 군대에 가지 않으니 도움이 되는 거죠. 이 공명첩 발행이 양난 직후 재정의 문제로 실시된 것을 기억합시다.
A: 그렇게 되면 후기에는 군인이 부족한거 아닌가요?
후기에는 모병제를 실시하여 직업군인을 고용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선 신분에 관계없이 속오군 (예비군) 체제를 운영하죠.
또 조선 후기는 상업이 굉장히 발달하여 많은 상인들이 나타난다고 했었죠?
돈이 있는 상민들에게는 이 공명첩이 매력적인 겁니다. 그러면서 조선 후기에 양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 수는 줄어들죠. 신분제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죠? 우리의 평등 사회와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 배경에는 이모작, 이양법, 수공광업의 인기, 광작 경영 등의 연쇄적 작용이 있었죠.
양난 이후의 정치 변화는 잘 알고 있죠? 효종 때 예송 문제도 있었고, 숙종 때 환국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예송,환국 모두 세력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죠. 결국 경신환국때 남인이 완전히 패배하고요.
그런 조선 후기 정치환경 속에서 양반들도 분화합니다.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 없습니다.
이렇게 환국의 과정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던 양반을 권반, 정치투쟁에서 밀려나 향촌에 온 양반들을 향반이라고 합니다.
향반 라인에도 오르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한 사람들은 잔반이라 하죠. 어울리는 이름이죠? 남은 반찬.
중인 봅시다. 중인에는 첩이 자식인 서얼, 그리고 기술직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얼은 더 이상 자기들을 차별하지 말라며 신분 상승 상소를 올립니다. 근데 이게 꽤 먹힙니다. 정조 때 서얼들을 등용했다고 했잖아요.
이들은 정조가 세운 인재양성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 검서관에 많이 등용됩니다.
나중에 배울테지만 소비이론을 주장했던 박제가, 그리고 유득공도 모두 서얼 출신으로서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었었죠.
기술직 중인들은 이런 서얼들을 보면서, 뭐야 쟤네들은 왜 올라가? 하면서 우리도 하자! 해서 소청을 합니다.
소청도 상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죠.
얘네들은 돈을 무지 잘 벌어서 애초에 양반보다 잘 살았거든요. 이들은 양반들처럼 시사로 모여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립니다.
상민은 바로 위 경제 파트에서 했죠?
이양법의 결과 임노동자와 광작경영을 하는 상민, 즉 농민층에 분화가 이루어진다 했죠.
이 중에서 광작경영이 가능했던 상민은 부농이 되고, 덕대 밑에서 돈을 받으며 일하는 임노동자로 나뉩니다.
근데 이 부농들이 당시 족보가 시장에 나오니 돈도 많겠다. 양반들의 족보를 사기 시작하죠.
그럼 대체 양반의 족보를 파는 사람은 누굴까요? 아까 말한 환국의 과정에서 완전히 몰락해 버린 잔반이겠죠.
이렇게 부농들은 족보를 매입하거나 심지어는 위조까지 합니다.
게다가 납속책(공명첩)의 존재로 부농들이 대부분 양반이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원래 조선의 오리지널 양반 인구가 전체에서 7%가 채 안됩니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 양반의 인구가 60,,70,, 90%까지 증가합니다. 전 국민의 양반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평등사회!
이제 천민들을 볼까요? 천민의 대부분은 노비였습니다.
납속책 제도를 통해 사람들, 특히 상민들이 양반으로 탈바꿈하는 모습 보셨죠?
근데 세금을 주로 내던 층이 상민인데, 싹 양반으로 올라가면 세금을 누가 냅니까? 그래서 노비들을 양민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법은 노비종모법.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제도죠. 이전까지만 해도 일천즉천이라 하여 한쪽만 천해도 천민이었습니다.
또 아예 공노비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언제? 정조의 아들, 순조에 의해서요.
이렇게 신분사회에서 많은 변화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향촌 마을에서는 어땠을까요?
향촌에는 여전히 나 양반이야~ 하는 향반들이 있습니다. 중앙에서 밀렸지만 말이죠.
근데 향촌에 또 양반이라고 등장하는 이들이 있죠? 상민에서 양반이 된 사람들이요.
그럼 기존의 향반과 새로운 향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구향은 신향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오리지널이니까요.
신향들을 보며 저런 상것들, 돈 좀 있다고 쯧쯧. 이런 태도를 취하죠 당연히 신향들도 나 양반이야, 엣헴 이러고 있죠.
이런 신향과 나름대로의 차이점을 보이기 위해 구향들 사이에는 보학이라는 게 유행합니다.
족보를 외우는 거죠. 나의 조상은 누구로부터 출발했고 ~~..~~.. 이런 걸 달달 외웁니다. 상민들은 조상에 양반이 없으니까요.
그다음 자신의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들을 굉장히 많이 세웁니다.
이 모두가 우리는 근본부터 양반이다~ 하며 거들먹대기 위함이죠. 심지어는 구향들끼리 모여서 살기 시작합니다.
이걸 동성촌이라 합니다. 김씨 집안, 박씨 집안 이런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죠.
이런 모습들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왜냐면 구향들은 사실 절박하거든요.
까딱하다가 신향들한테 밀릴 위험이 있잖아요. 여기서 비롯된 문화죠.
이에 맞서서 신향들은 돈이 많은 걸 이용해 그 향촌에 와있는 사또를 매입합니다.
돈이 있으니 수령과 결탁하는 거죠. 향촌에 있는 양반리스트, 향안 기억나시나요?
신향들은 매입한 사또에게 이 향안을 불태우도록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신분세탁이죠.
이전에는 향촌에서는 향안에 의해 양반과 상민이 정확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불이야~ 하는 겁니다. 그다음 ‘지금 향안이 불탔사옵니다’ 하면서 북치고 장구치고 합니다.
당연히 돈을 받고 꾸민 짓이겠죠. 어쨌든 향안이 날아갔으니 다시 써야겠죠? 바로 그때 신향의 이름을 슬쩍 넣는 겁니다.
이렇게 구향과 신형이 맞붙는 향전이 나타는 조선 후기의 사회.
근데 단순히 돈이 많아졌다고 이렇게 태도가 확 달라지겠습니까?
이전에는 신분제가 머릿속에 콱 박혀있어서, 양반이라 하면 함부로 말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상민과 천민들이 신분제 사상에서 벗어나, 평등의식을 성장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일종의 계몽을 통해 그 벽을 허문거겠죠?
그 민의 의식을 성장시켜 주는 무언가는 바로 당시에 유행한 예언 사상입니다.
'이 씨 조선은 무너졌다, 이제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와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이 씨 세상은 무너지고 정 씨 세상이 온다는 정강록이라던지, 미륵신앙 등이 유행합니다.
기존 양반에 대한 권위가 확 떨어지는 모습.
게다가 평등의식을 올려주는 종교가 만들어집니다.
먼저 서학입니다. 말 그대로 서양의 학문인데요, 학문을 갖춘 상태로 조선에 들어왔지만 사실 서학은 천주교를 의미합니다.
종교가 학문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죠. 핵심이 뭐냐면, 천주교에선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제사를 못 지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금수만도 못한 것! 이게 당연한 시선이겠죠.
그래서 중앙에서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합니다. 아주 사악하여 믿을 수 없는 종교요.
들어보셨죠? 여러 박해사건, 병인박해 유명하잖아요. 또 신유박해가 좀 큰 사건이었는데, 순조때 일어난겁니다.
신유박해 때는 정약용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 하면 정조와 함께 정조의 세상, 수원 화성을 만들었던 인물이죠? 그가 바로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정조가 너무 급작스레 죽은 바람에 유교사회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죠. 결국 박해를 받고 유배를 가게 되는 모습.
바로 이때, 자꾸 천주교를 박해하니까 황사영 이란 사람이 천주교 교황에게 백서를 보내려 합니다.
근데 그 내용이 외국군대를 끌고 와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는 조선 정부를 벌주라는 내용입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입니다.
분명히 조선은 비인권적 방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부가 입니다.
하지만 이 정부를 외국군을 끌고 와서라도 타도하는 게 과연 정답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물론 답은 없습니다.
서학의 확대와 동시에 동학도 등장합니다. 최제우가 창시하고 최시형이 이어받죠.
그럼 동학은 유교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들은 인내천과 시천주를 주장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천주교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그랬고, 동학은 사람은 곧 하늘이다. 즉 모두 평등 사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신분제 사회를 부정하는 종교들이 유행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 최제우는 사형당하긴 합니다.
조선 왕조 500년, 성리학에서 출발했던 조선의 기본적 틀 자체가 흔들려버리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평등 의식을 깨우쳐주는 것들이 등장하고, 이 때문에 상민들이 양반들에게 너와 나는 똑같아. 하며 향전까지 연결되는 모습.
19세기는 의식 성장뿐만 아니라 들고일어나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세기의 민란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 불리는 만큼, 유명한 민란들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초반 홍경래의 난, 19세기 중반의 임술 농민 봉기가 있습니다. 홍경래의 난부터 살펴보죠.
이름 자체는 홍경래의 난이지만, 실질적 주도자는 우군칙이라는 인물, 그리고 광산 노동자와 농민들이 하나가 되어 일으킨 겁니다.

보시다시피 서북 지역에서 일어난 건데, 이쪽 지역은 고려 시대 강동 6주와도 연결되어 있죠?
홍경래의 난의 주 무대는 정주성입니다.
원인이 뭐였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북 지역민에 대한 차별입니다.
이 지역의 양반이 한양에 오면 노비가 말을 놓으며 어디서 왔수? 이럴 정도니까요.
아무리 신분제가 희미해진다 해도 상민이면 모를까, 양반과 노비는 여전히 하늘과 땅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정도로 서북지역민의 차별이 심했다는 겁니다.
이때의 왕이 세도정치의 순조인데, 결국 정주성에 관군이 쳐들어가 모조리 죽여버리며 난을 진압합니다. 진압보단 학살에 가까웠죠.
이번엔 19세기 중반의 임술 농민 봉기를 살펴봅시다. 홍경래의 난이 서북지역이라면,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역에 한정 되지않고, 진주에서 출발하여 전국으로 확산이 됩니다.
당시 탐관오리 백낙신의 부정에 항거하면서 유계춘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사건인데, 탐관오리가 그냥 있는 게 아니겠죠?
원인이 있습니다. 19세기니까 정치적으로 본다면 세도정치의 시기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관직에 오른 뒤 구매할때 쓴 돈을 백성으로부터 복구하려 하는 겁니다.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는 거죠. 이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 철종 때인데,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니까 정부도 놀랍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대응책들을 마련하게 됩니다.
우선 문란이 일어나는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구나~ 해서 조사하는 관리 안핵사를 파견합니다.
이 안핵사 책직을 맡은 인물이 박규수인데, 박규수는 앞으로 자주 등장할 겁니다.
개항기때 평양감사로서 제네럴 셔먼호를 불태운 인물이기도 하죠.
나중에 강화도 조약 즈음에서 통상 개화파로 성장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자주 나오는 인물이니 이름만 기억해 둡시다.
아무튼 삼정의 문란이 문제라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조세, 세금 제도를 고친다며 바로 삼정이정청을 만듭니다.
그다음 이때부터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려 했죠. 근데 이미 시대 자체가 너무 기울어져있었습니다.
썩을대로 썩은 모습이라 쉽게 수정이 되지 않는 모습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조선의 건국교인 성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망할때가 온거죠.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근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데, 이제 남은 문화만 보고 조선 후기를 끝내봅시다!
적다보니 글이 되게 길더라구요. 그래도 덜 적었다면 덜 적었지 .. 절대 빼놓을수 없는 요점만을 담은게 이정도입니다.
정리표 다시 한번 보면서 복기하고, 다음 글에서 뵙죠.
고생하셨습니다.
| 신분제 동요 | 민의식 성장 | 19세기 민란 |
| 양안, 호적 손실 - 국가 재정 하락 - 납속책(공명첩) 양반 : 권반, 향반, 잔반 구향(향반) : 보학(족보), 사당 유행 중인 : 서얼 - 신분상승상소 , 규장각 검서관 등용 기술직 중인 : 시사 조직 상민 : 부농 - 족보매입, 납속책을 통해 양반화 (신향) 임노동자 천민 : 노비종모법, 공노비 해방(순조) |
예언사상 등장 : <정감록>, 미륵신앙 서학 (천주교) : 제사 X - 병인박해, 신유박해, 황사영백서사건 동학 (최제우-최시형) : 인내천, 시천주 |
홍경래의 난(순조) : 서북지역민 차별 -우군칙 + 노동자, 농민 -정주성 항전 임술농민봉기(철종) : 탐관오리 백낙신 -세도정치의 결과 -삼정의 문란 대응 -안핵사 파견 (박규수) -삼정이정청 설치 -암행어사 파견 |
경제도 한 번 더
| 전기 | 후기 | 수취제도 전세화 금납화 |
|
| 조세 | 과전법 (1결 30두) 공법 (전분 연분, 1결 4~20두) |
영정법 (인조, 1결 4두) | |
| 공납 | 특산물 - 방납의 폐단 | 대동법 (광해군, 1결 12두) -선혜청 -공인 등장 ( 상품 화폐 경제) |
|
| 역 | 군역 감소, 요역 증가 -대립, 방군수포제(1년 2필) 성행 |
균역법 (영조, 1년 1필) -어,염,선박세 -선무군관포 -결작 실시 (1결 2두) |
| 농업 | 전기 | 후기 |
| 논 | 직파법 이양법 (남부 일부 지역) |
이양법 (전국 확산) -이모작, 광작 가능 -생산력 증가, 투입 노동력 감소 |
| 밭 | 2년 3작 | 상품작물 (담배, 인삼, 면화) |
| 지대 | 타조법 (1/2) (신분적 관계) | 도조법 (계약적 관계) |
| 농서 | <농사직설> <금양잡록> | <농가집성> <색경> |
| 상업 | 전기 (중농억상) | 후기 (공인,거상 = 도고) |
| 관허상인 | 시전상인 (종로) 보부상 (지방 장시) -혜상공국, 황국협회 |
공인(대동법) 시전상인 금난전권 획득 정조의 신해통공, 금난전권 폐지 보부상의 전국적 유통망 |
| 사상 | 거상, 객주, 여각, 난전(영세상인) | |
| 화폐 | 상평통보 (숙종) | |
| 수공업 | 관영수공업자 | 민영수공업자, 독립수공업자 선대제 실시 |
| 광업 | 관영광업자 | 민영광산 개발 (특히 은광) -설점수세제 덕대의 등장, 광산 노동자 고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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