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0. 지난 이야기
여러분은 지난 글을 통해 호족들이 초기 나라를 세우고 서서히 기득권화되는 모습들, 그리고 광종의 숙청 속에서 일부가 문벌귀족화 되는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근데 광종이 호족을 다 숙청해버렸는데 어떤 호족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걸까요?
광종이 모든 호족을 죽여버린 건 아닙니다. 정치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했으니, 반발하지 않은 호족은 죽일 필요가 없던 것이죠. 지방에 있던 호족, 향리는 살아남습니다
이렇게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은 호족들은 경종 때부터 문벌귀족으로 탈바꿈합니다.
이때는 음서, 공음전 등이 합법이어서 호족들이 부와 권력을 세습하며 세력을 키웁니다. (잠시 후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중앙을 장악하고, 이러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문벌귀족이 되지 못한 자는 향리 계층이 되기도 했죠.
주도 세력의 변화뿐만 아니라,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며 지배층들이 조금씩 변합니다.
고려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행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선종이 유행했었죠.
그런데 지배층들은 다시 교종을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중기, 문벌귀족들이죠. 선종보다 있어 보인다는 이유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고려는 원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는데, 갈수록 신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자꾸 중국과 부딪히게 되는데, ‘나 신라 계승했어’라고 하면 훨씬 더 안전하고 편하니까요.
이렇게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며 변화되는 지배층의 모습 몇 가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해보죠.
1. 고려 중기
문벌귀족의 성장 배경에는 여러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아까 말한 음서와 공음전. 여기에 들어간 ‘음’이 그늘입니다. 조상의 그늘 아래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죠.
음서의 경우 5품 이상의 집안에서 태어나면 과거를 보지 않아도 5품이 되고, 공음전이라 하여 토지를 계속 받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관직과 월급이 들어오는 거죠.
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입을 더 늘리지 않으려고 문벌귀족끼리의 폐쇄적인 결혼을 하고, 심지어는 근친혼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면 계층사다리가 끊기게 됩니다.
분명 중세의 나라라는 첫 타이틀을 가진 고려이니 만큼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자유로워야 할 텐데 말이죠.
물론 관직에 누구나 나설 수 있는 과거제가 있었지만,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배출하는 속도보다 문벌귀족끼리 세습하며 관직을 차지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점점 불균형이 심해집니다. 그러면서 점점 문벌귀족들의 갑질과 횡포 또한 심해지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자겸의 난이 일어납니다. 인종 때 이자겸과 척준경이 일으킨 건데, 살펴보면 이자겸과 인종의 관계가 묘합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동시에 이자겸은 인종의 장인입니다.
외할아버지인데 장인이네요? 그러면 인종이 누구랑 결혼한 거죠?
이모랑 결혼한 겁니다. 근친혼이죠.
근데 이 결혼을 계속 시도한 사람은 이자겸입니다. 권력에 눈이 멀어서 왕에게 계속 딸들을 보내죠.
그러면서 이자겸의 권력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도 왕 한번 해볼까?’ 하는 거죠.
그래서 척준경을 회유해서 같이 일으킨 게 이자겸의 난의 배경입니다. 물론 실패합니다.
근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시작됩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자꾸 개경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좋은 거 다해먹으니까 그 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서경파라고 합니다. 묘청, 정지상 등등.
그럼 개경파에도 묘청과 같은 대표적 인물이 있겠죠? 바로 김부식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삼국사기의 저자 맞습니다.
이 둘은 대비되는 점이 많습니다.
우선은 묘청은 승려니까 불교를 숭상하고, 풍수지리를 언급하며 ‘개경의 기운은 끝났어’를 주장합니다. 반면에 김부식은 유학자죠.
또 서경이 어딥니까? 고구려의 수도였죠. 서경파들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천도의 위치로 서경을 주장한 겁니다.
그럼 개경파는 신라의 계승 의식을 가지겠죠? 글의 첫 문단에 말했듯 중기를 지나면서 기득권들은 더 안전하고 편리한 신라의 계승 의식을 택하게 됩니다. 개경에서 갈라먹기 하던 개경파가 그 기득권에 속하겠죠.
그리고 마침 서경파와 개경파가 대립하는 와중에 여진(금)이 고려에 사대를 요구합니다.
이때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서경파는 금 정벌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더 안전하고 편리한 신라 계승 의식을 가진 기득권 개경파는 당연히 금에 사대하자 합니다.
이런 팽팽함 속에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결국 김부식의 공격에 의해 진압됩니다.
이렇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등 곧 무언가 일어날거라고 시그널을 보내지만 문벌귀족들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냥 이번에도 잘 넘어갔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기득권에 불만을 가지고 여러 난들이 일어나면 중앙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러는 와중에 문인들이 무너지는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 두 가지 일어납니다.
2. 무신정변의 발단
수염사건이라고 하죠. 김부식의 아들이자 문신인 김돈중이 무신 한 명의 수염을 태웁니다. 그런데 하필 그 무신이 정중부입니다.
정중부는 조선의 이순신급으로 정말 존경받는 무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염을 길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0년을 길러도 사극 속의 장군들처럼 멋진 수염을 만드는 건 정말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정중부 역시 오랜 시간 공들여 수염을 관리해 왔습니다.
이를 김돈중이 장난 삼아 촛불로 태워버립니다. 새파랗게 어린 문신이 당대 최고의 무신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것이죠.
권위의식에 찌들어 선을 제대로 넘은 겁니다.
뒤이어 일어난 뺨사건은 무신정변의 결정적인 원인이죠.
어린 문신들이 항상 문제입니다. 한뢰 역시 젊은 나이의 문신이었습니다.
왕이 행차하는 길에서 한뢰는 왕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무신, 이소응에게 ‘수박희’를 시킵니다.
수박희란 손을 이용해 무투 하는 것인데, 힘센 다른 무신을 데려와서 둘에게 수박희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리 무신이지만 나이가 많은 이소응은 이를 거절하죠.
그러자 한뢰는 ‘이러고도 네가 무신이냐?’하면서 이소응의 뺨을 때립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한뢰는 젊은 문신이고, 이소응은 무신 중에서도 짬이 찰대로 찬 고위 무신입니다.
당시 문신과 무신의 차별대우를 잘 보여주죠. 수염도 선을 넘었는데, 뺨을 친 한뢰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불과 몇 시간 뒤 철퇴를 맞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무신들이 분노하여 일으킨 게 바로 의종 때 일어난 1170 무신정변입니다.
이의방, 정중부 등이 갓을 쓴 문신들을 모두 죽여라~ 하며 싹 쓸어버립니다.
이들을 제압할 군대는 없었느냐? 군대가 뭡니까. 무신이죠. 지켜줄 사람이 없는 문신들은 추풍낙옆처럼 쓰러집니다.
그렇게 문신들의 시대는 끝나고 무신들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3.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지만, 역시 태생이 싸움이다 보니 그들은 정변 이후 서로 실세가 되겠다고 계속 싸웁니다. 정권이 계속 바뀌죠.
이의방 정중부에서 경대승, 이의민으로 계속 바뀌다가 최충헌에 이르러 조금 안정됩니다.
최 씨 무신정권이 시작되는 거죠. 최충헌은 나름대로 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왕에게 봉사 10조를 올리기도 했죠. 왕이 없는 게 아니라, 왕은 계속 있고 문신들이 무신으로 바뀐 겁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최우를 끝으로 무신정권은 100년 남짓한 시간만에 무너집니다.
무신정권이 몰락한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무신정권 당시의 정치, 군사, 사회 모습만 잠깐 보고 넘어갑시다.
무신정권 이전의 권력 기구로는 뭐가 있죠? 도병마사, 식목도감 뭐 이런 게 있었죠.
그럼 무신들은 어떤 권력 기구를 이용했을까요? 짧게 설명드렸었는데, 중방이라는 겁니다.
이 중방을 이의방부터 이의민까지 주로 활용하다가 최충헌 때가 되면 더 강력한 권력 기구를 만듭니다.
교정도감을 만들어 최충헌 스스로 기구의 별감이 됩니다. 권력을 좌지우지하죠.
교정도감은 정치를 교정한다~ 뭐 이런 건데, 이름이 도감이니 임시 기구인 건 아시겠죠?
그의 아들 최우는 거기에 더해 인사권도 장악하기 위해서 정방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깡그리 죽였던 문신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하죠. 이때 문신들을 위해 공부하는 공간, 서방을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또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신이니, 도방이라고 군사 기구도 있었습니다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여기서 경대승 때 만든 것인데 폐해가 너무 심해서 이의민 때 금방 없애버립니다.
그러다가 최충헌 때 다시 도방을 활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최우 역시 이어서 도방을 씁니다.
최우 때는 도방에서 삼별초를 배출하기도 하죠. 대 몽골 항쟁에서 공을 세운 군사집단 삼별초 아시죠?
그런데 최충헌 이전만 해도 최우처럼 아들을 다음 자리에 앉히는 게 아닌, 서로 싸워서 정권을 잡은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사회가 혼란했겠죠?
그 혼란을 틈타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망이 망소이의 난입니다.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건데, ‘소’가 어디였죠?
특수행정구역, 그중에서도 수공업자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죠. 지역에 대한 차별도 심했고요.
또 김사미, 효심의 난이 있겠네요.
이렇게 양민들이 힘들다고 들고일어나는 와중에, 밑바닥인 천민들도 빠질 순 없죠. 최충헌 때 개경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납니다.
만적의 난은 놀랍게도 노비 출신의 만적이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일어납니다.
이게 왜 놀라운 거냐면, 당시에는 자신이 노비인 거에 억울함이 없었습니다.
거기엔 불교도 한몫했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고, 그리고 또 노비 가문에 태어났으니 스스로의 신분에 억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민주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엔 부조리하지만, 그땐 이걸 자각하지 못했어요. 이 당연함을 깨고, 의문을 제기한건 흔하지 않았죠.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요.
이렇게 해서 고려사의 절반 이상을 끝냈네요.
고려 초 – 중 – 무신정변까지 왔으니 다음은 뭐가 남았죠?
원 간섭기, 그리고 원 간섭기의 권문세족에 맞서는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를 살펴봐야겠죠.
무신정변 이후, 그러니까 고려 후기부터는 외침이 잦은데, 특히 몽골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몽골과의 관계 유무로 고려의 시기도 어림잡을 수 있죠.
거란과 여진은 고려의 초-중기에 쳐들어왔지만,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아직 설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린과 여진의 침략을 살펴보고 그다음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4. 고려와 주변국가들
*호족 때는 거란족의 침입, 문벌귀족 때는 여진족, 무신 때는 몽골, 이런 식으로 구분하시면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4-1) 거란의 침입
거란족은 총 3번 쳐들어옵니다.
거란의 1차 침입의 명분은 이러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지배층들이 편익을 위해 신라 계승 의식을 택하자, 옛 고구려의 땅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서경을 포함한 북쪽 땅)
거란의 주장을 듣고 고려에서 여러 의견이 나옵니다. 땅을 떼어주고 거란과 사이좋게 지내자는 소리도 나오죠. 그러자 서희가 나섭니다. 이때 서희의 말이 정말 감명 깊습니다.
“그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요구하는 걸 그대로 넘겨준다면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평가할 때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
그러고는 거란족을 자기가 만나보겠다고 하죠.
그때 서희와 만났던 거란의 장수가 소손녕입니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으므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으니 땅을 가져가는 게 맞다고 말합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에서 따온 거라며 국호 자체가 고구려 계승을 증명한다며 서로 티격태격거립니다.
이때 서희는 이상함을 느낍니다. 거란족은 발해를 공격했을 땐 기마병으로 일사불란하게 수도까지 점령했습니다.
반대로 이번에는 쳐들어오자마자 공격하지 않은걸 수상하게 여기죠.
알고 보니 거란족은 중국 송나라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송과 고려가 친하니 거란에서 송을 치는 순간 후방이 비어 고려에게 침략당할 것을 대비한 것이죠.
따라서 송과 싸워야 하니 쓸데없이 군사력을 소비하지도 않고요.
즉 그 땅을 먹음으로써 송과 고려의 관계를 끊으려 한 겁니다. 서희는 이를 간파하고 혀를 놀립니다.
‘고려도 거란과 친선관계를 맺고 싶다. 그런데 거란과 고려 사이에 있는 강동 6주에 여진족이 들어와 있어서 갈 수가 없다. 그 지역을 우리한테 넘기면 너희와 친하게 지내겠다’
소손녕은 이 꾐에 넘어가 그대로 강동 6주를 주고 떠납니다.
거란이 침략을 했으나 오히려 우리가 땅을 가진 모습. 놀라운 서희의 화술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고려는 거란과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쳐들어옵니다. 2차 침입이죠. 여기서도 거란은 명분이 있습니다.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그리고 당시 고려에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걸 빌미 삼아 네가 뭔데 우리의 허락도 안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하며 쳐들어왔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도 양규가 거란을 잘 회유해서 다시 돌려보냅니다. 마찬가지로 거란과 친하게 지내겠다 하고 돌려보냈죠.
그런데 이 낯짝 두꺼운 고려는 또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거란은 이것들은 말로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군대를 왕창 몰고 쳐들어옵니다.
3차 침입에서는 거란이 외교 할 생각은 추호도 없이 군사력으로 끝장을 보려고 했습니다.
1,2차 침입은 장난이었고 3차 빅 웨이브가 시작된 거죠.
고려도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꿀발린 소리는 더 이상 안 통하니 고려도 군사로 맞서기로 합니다. 거란에 대비하여 광군이라는 군사조직도 정비하죠.
그리고 그 유명한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고려인들은 거란의 침략에 불심으로 맞서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란의 모든 침략을 막아낸 뒤 또 침략이 들어올까 봐 개성 주변에는 나성을, 국경에는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사실 천리장성은 거란뿐만 아니라 여진족도 막기 위함이었죠.
4-2) 여진족(금)의 침입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진족이 빈번하게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말을 타고 뛰어난 기동성을 자랑했죠.
이를 본 윤관은 그들에게 맞서 싸울 기병이 필요하겠구나 생각하고 별무반을 편성합니다.
거란족의 침입 때 광군이 생겼다면 여진의 침입에는 별무반이 생긴 거죠.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은 그 이름에서 특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는 기병, ‘보’는 보병, 항마군은 마귀를 물리친다 해서 승려로 구성된 승군, 승병입니다.
이 별무반은 효과적으로 운영되어 국방에서 벗어나 오히려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빼앗게 됩니다.
이때 확보한 지역은 동북 9 성인데, 관리가 어려워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줍니다.
그런데 이 여진이 점점 커져서 아예 사대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기득권자들은 문벌귀족으로 금의 사대에 굉장히 보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금의 사대에 응하죠. 금의 사대를 받아들이자는 대표적인 인물이 김부식, 이자겸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금의 사대에 반대하는 세력이 기억나시나요? 바로 묘청입니다.
신라 계승 의식이 강한 기득권층과 달리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서경파는 금의 사대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키며 금 정벌을 주장했었죠. 이를 김부식이 제압하고요.
여기까지가 12세기 여진족과의 항전 과정입니다. 별거없죠?
4-3) 몽골의 침입
산 넘어 산이라는 말처럼 10-11세기의 거란, 12세기의 여진족의 침입에 살아남은 고려는 13세기 또 한 번 공격을 받게 됩니다.
바로 원나라인데요, 당시의 몽골은 대제국을 세울 정도로 강력했지만 고려의 정권은 무신정권이었습니다.
칼로 살고 칼로 죽는 이들은 절대 피할 생각이 없고 끝까지 맞서 싸우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죠.
말을 타던 몽골족에 맞서기 위해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결사 항전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뭔가 놓친 게 있지 않나요?
육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무방비상태로 몽골에 노출이 돼버립니다.
몽골은 지나가며 모든 걸 초토화시키는 것은 물론 거란을 막을 당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도 불태웁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선덕여왕 때 만들었던 신라의 비전, 황룡사 9층 목탑도 불태워버리죠.
지도부는 강화도로 들어가 버리고 지켜줄 사람도 없는 육지의 고려인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항전을 펼칩니다.
김윤후가 용인에서 승려들과 함께 몽골의 장수 살리타를 죽인 처인성 전투를 시작으로 충주에서는 노비들과 함께 일치단결해서 또 승리하죠.
그는 사기 증진을 위해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노비들의 문서들을 다 불태워줍니다. 물론 김윤후에게는 해당 결정권이 없었지만, 이 같은 강단이 있었기에 이길 수 있던 것이죠.
또 충주의 다인철소에서 백성들이 모여 몽골군을 물리칩니다. ‘소’는 향, 부곡, 소의 소입니다. 철을 다루는 수공업자들이 똘똘 뭉친 것이죠. 어찌 보면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운 것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무신정권은 항복합니다. 항복 이후 개경으로 환도하죠.
그런데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배중손과 김통정. 삼별초를 이끄는 장수들이었죠.
최우가 설치한 정방에서 배출한 사병, 삼별초 기억나시죠?
이들은 강화도 – 진도 – 제주도로 옮겨가며 끝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 패합니다.
이러한 고려의 대몽 항쟁은 약 30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요, 이 사이에 거란 때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처럼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16년간 팔만대장경을 만듭니다.
몽골은 고려가 30년이나 맞서 싸우자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려인들을 인정해 주며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내정간섭에 그치게 됩니다.
5. 원 간섭기
다만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뿐이지 영토를 많이 내주긴 합니다.
철령 이북 지역엔 쌍성총관부가, 서경에는 동녕부가.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죠.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려의 왕들을 원나라 황실 공주들과 결혼시키기 시작합니다. 즉 고려를 부마국으로 만들려는 거죠.
근데 여기까지만 들으면 부정적인데, 당시 세계질서는 원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원나라의 중요한 회의에 고려의 왕들이 부마국으로서 참석하게 됩니다.
의외로 좋은 점도 있던 것이죠. (심지어 서열도 높았습니다)
나름대로 원 간섭기 안에서 고려의 위상을 찾아낸 모습, 하지만 이때부터 왕들은 충 돌림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충선왕, 충렬왕 등등
그리고 관제도 개편당합니다. 고려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원래 2성 6부 체제였죠?
몽골은 이를 보고 감히 대중국의 시스템을 너희들이 왜? 하며 2성 6부를 첨의부와 4사로 바꿉니다.
2성이 첨의부로 바뀐 것이고 6부가 4사로 바뀐 겁니다.
그리고 중추원의 군국기무를 담당하는 추밀은 밀직사로 바뀝니다.
당연히 내정간섭도 활발해지죠. 다루가치가 고려에 파견되어 식민지 총독 마냥 행동했습니다.
내정간섭의 일환으로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동쪽을 정벌하는 기구라 하여 정동행성인데, 동쪽이면 일본이죠?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침략하게 됩니다.
근데 이때 몽골이 하필 여름에 침략을 해서 태풍을 맞으며 출항했던 몽골의 배들이 모두 가라앉게 됩니다.
이를 두고 일본사람들은 그 태풍을 신풍이라 하죠. 신풍이 일본어로 가미카제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근데 원은 침략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동쪽을 정벌하기 위해 이문소를 설치합니다.
고려가 아니라 원려라 할 정도로 정말 많은 간섭을 했죠.
근데 설상가상 원은 고려에 공녀까지 요구합니다. 딸을 데려오라 이건데 이것 때문에 고려에서 시작된 풍습이 조혼입니다.
일찍 결혼시켜서 못 데려가게 하려는 거죠.
원 간섭기가 시작되니 당연히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처럼, 원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몽골풍이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몽골인처럼 변발도 하고 호복도 입죠.
동시에 몽골에서도 고려의 문화가 유행합니다. 잡혀간 공녀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를 고려양이라 합니다. 일종의 교류관계가 나타나는 모습.
그리고 원에 빌붙어서 성장하는 세력이 있을 테니 그들을 바로 권문세족이라 합니다.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와 정방을 차지하고 음서를 통해 정치를 장악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마어마한 대농장을 확보하게 되죠. 친일파와 비슷하죠?
아무튼 그렇게 원 간섭기가 지속되다가, 원에 저항하는 왕이 등장합니다. 대몽 정치를 실시한 대표적인 왕이죠.
5-1.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은 중국이 원.명 교체기를 겪으며 원이 휘청이자 이를 틈타 반원 자주정책을 실시합니다.
우선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시킵니다. 정동행성과 이문소도 폐지하고 몽골풍을 제제합니다.
그리고 기황후를 숙청하는데, 권문세족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기황후는 본디 원에 끌려간 공녀였지만 이쁨을 받아 고속 승진하여 원의 황실까지 닿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권문세족이 가졌던 경제력의 기반, 대농장도 모두 몰수합니다.
이때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게 전민변정도감입니다.
신돈이 운영한 전민변정도감은 말 그대로 토지와 백성을 ‘변정’ 즉 원위치로 돌려놓기 위한 ‘도감’ 임시기구라는 소리죠.
전민변정도감은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고려 초기에 시행된 광종의 노비안검법과 유사한데, 그때 광종은 호족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하기 위해서 시행했고, 또 노비들이 풀려나 양민이 되니 세금을 내기 시작하여 국가 재정 또한 확보했었죠.
이 전민변정도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적으로 권문세족이 확보하고 있었던 백성과 토지를 다시 원위치로 돌림으로써 멀쩡히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많아져 국가의 재정이 확보되는 것이죠.
당연히 기득권세력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공민왕은 피살되는데 공민왕은 죽기 전에 개혁의 씨앗을 남겨두고 죽습니다.
공민왕이 반원 자주정책을 시행했을 때 함께한 세력이 신진사대부인데, 이들은 바로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장하여 나중에는 결국 조선을 성장하죠.
물론 아직은 아닙니다. 공민왕이 피살되기 전으로 돌아가, 원의 간섭이 수그라 들고 나라가 안정화될 때쯤 14세기에는 홍건적이 쳐들어옵니다. 고려 정말.. 힘들죠?
이때 중국이 원명 교체기여서, 홍건적들이 통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삐가 풀린 홍건적이 고려에 쳐들어와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죠.
동시에 왜구도 창궐하여 남해안, 동해안 지역이 쑥대밭이 됩니다.
이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세력이 바로 신흥 무인 세력입니다.
최영아시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홍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최영의 명성이 올라가게 되죠. 또 진포에서는 최무선이 활약합니다. 일명 화포 최무선.
최무선은 화약, 화포를 다루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왜구를 다 때려 부숩니다. 왜구들은 화포에 깜짝 놀라 지방곳곳으로 도망가지만, 뿔뿔이 흩어진 왜구들은 백성들에 의해 짓밟힙니다.
대표적으로 지리산 자락에서 왜구를 완벽히 소탕했던 황산전투가 있겠네요.
황산전투에서 활약한 인물이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입니다. 이렇게 외침을 저지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이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조선을 세우게 되는 거죠.
6. 조선의 건국 배경
시간이 흘러 고려의 우왕 시기입니다. 중국에서 원명교체기를 겪으며 떠오르는 명나라가 고려에게 쌍성총관부를 내놓으라 합니다.
엄연히 고려의 땅이었던 철령 이북 지역을 공민왕이 탈환한 것인데, 이를 침략으로 보고 이런 주장을 했던 거죠.
요구도 아니고 사실은 통보에 가까웠습니다. 고려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거든요.
최영 장군은 이에 대해 말도 안 된다며 우왕에게 맞서 싸우겠다 합니다.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죠.
이성계가 출발을 합니다. 근데 이성계가 가는 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명은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의 라이징 스타인데, 공격하면 역린이 엄청날 거라 판단한 거죠.
이성계는 4 불가론을 주장하며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죠.
4 불가론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면 안 된다. 장마철이라 활시위가 잘 안 든다 등등의 명을 공격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근데 이성계는 군인 아닙니까?
군인이 명을 받들지 않고 회군을 했다. 이거는 명령 불복종으로 쿠데타를 의미합니다.
이성계는 이대로 개경으로 돌아가면 처형당할게 뻔했죠. 그래서 선수를 쳐 최영을 죽입니다.
우왕도 쫓아내어 공양왕을 세우는 등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에 실질적 고려의 주인이 된 이성계는 과전법을 실시합니다.
이전에 공민왕이 권문세족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행했던 전민변정도감은 충분히 효과적이었지만, 후에 공민왕이 피살되는 바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전법을 실시한 거죠. 같은 목적입니다.
그렇게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권력, 과전법으로 경제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마침내 1392년, 조선이 건국되죠.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아무튼간에 이렇게 잦은 외침 속에서 꿋꿋하게 500년의 역사를 지킨 고려도 끝이 났습니다.
조선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려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해 살펴보는 글을 작성하겠습니다.
| 호족 |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신흥무인세력 | |||
| 거란(요) | 여진(금) | 몽골(원) | 홍건적 왜구 |
||||
| 10-11C | 12C | 13C | 원 간섭기 | 공민왕 | 14C | 조선 | |
| 1차 : 서희(소손녕) 강동 6주 획득 2차: 강조의 변, 양규 3차 : 강감찬 귀주대첩 초조대장경 제작 광군 정비 천리장성 축조 나성(개경) |
윤관 별무반 편성, 동북 9성 획득,관리문제로 반환 금의 사대 요구-이자겸, 김부식 등 지배층의 수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실패 |
최우 : 강화도 천도 김윤후 : 처인성 전투, 충주 노비전투 다인철소 삼별초 : 배중손, 김통정 강화도 - 진도 - 제주도 팔만대장경 제작 초조대장경 소실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
영토 축소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부마국화 관제개편 : 2성 - 첨의부 6부 -4사 중추원 추밀 - 밀직사 내정간섭 : 다루가치 파견, 정동행성과 이문소 설치 공녀 차출 몽골풍 유행 권문세족 활개 정치) 도평의사사, 정방, 음서 경제) 대농장 |
쌍성총관부 탈환 전민변정도감 설치 기황후 숙청 |
공민왕 안동 피신 최영 : 홍산대첩 최무선 : 진포대첩, 화통도감 이성계 : 황산전투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 최영의 요동정벌 단행 이성계의 4불가론, 위화도 회군 최영 살해 후 과전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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