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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붕이와 함께하는 한국사

고대 국가의 문화 2 [종교]

[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고대 국가의 문화 1편에서는 그다지 어려운 게 없었는데, 이번 글에선 문화재에 대해 주로 다룰 겁니다.

 

여러 문화재를 생각하면 정말 짜증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름들도 복잡하고 그냥 외우려니 기억에 남지도 않고 그렇죠?

 

저도 처음 한국사를 접할 땐 그랬는데 외우려는 강박을 자제하고, 흘러가는 대로 의식을 맡기며 회독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구분이 가더라고요. 여러분에게도 무작정 외우기에만 집중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우선 문화의 가장 많은 부분은 종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탑과, 불상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의 외교를 보여주는 문화재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칠지도죠.

 

우선은 종교에 집중해 봅시다.

 

 

 

 

1. 유교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그 교리와 사상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어 널리 퍼진 종교가 바로 유교입니다. 유교는 국가가 불교를 공인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불교와 함께 공존했죠.

 

고구려는 유교 전파에 노력한 왕으로 소수림왕과 장수왕이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태학을 설립한 걸 알겠으나, 장수왕은 뭘 했을까요?

 

이전에 태학은 중앙에서만 운영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방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장수왕이 경당을 설치합니다. 똑같이 유교를 가르치는 공간이에요.

 

필요성을 자다가 갑자기 느낀 건 아니겠죠?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펼치기 위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자, 중앙이 아니었던 지방의 교육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특히나 경당은 당시 삼국의 전쟁이 활발하여 문뿐만이 아니라 까지 가르친 종합적인 시설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학교에서부터 싸우길 시작하니 군사 강국이 된 걸지도요.

 

백제도 분명 이런 교육기관이 있었을 텐데,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신 유학의 발달, 즉 학문의 발달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남아있습니다

 

백제의 왕인이라는 사람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파했던 기록이 남아있거든요. 다른 나라로 가서 어떤 걸 가르친다는 건 그만큼 문화적 수준이 걸출하단 얘기겠죠.

 

실제로 현재 일본에는 마쓰리의 지역 풍습이 있습니다. 왕인이 마을에 오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가 아직까지 이루어지고 있죠.

 

마찬가지로 신라도 유학을 공부했다는 근거가 있어요. 임신서기석이라는 비석인데

 

 

신라의 청년들이 ‘우리 언제 언제까지 유교 공부를 끝내자’ 약속한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근데 이 비석은 임신년에 세워져서 임신서기석이 아닙니다.

 

그럼 왜 임신일까요?

 

혹시 여러분이 어릴 적 적었던 타임머신 쪽지 기억나시나요?

 

예를 들자면 여러분은 친구와 한능검 자격증을 따려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적는 거죠. 우리 2주 안에 1급 따자! 적은 뒤 땅에 묻습니다.

그런데 이 쪽지가 운이 좋게 잘 묻혀서 시간이 흐르고 흘러 200년 뒤에 쪽지가 발견됩니다.

 

그럼 학자들은 이걸 ‘2200년의 약속’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리고 말하겠죠.

 

이 ‘2200년의 약속’은 200년 전의 당시의 사람들이 한국사 공부를 했다는 근거입니다.

 

신라의 학자들도 똑같았습니다. 임신년에 발견돼서 임신서기석이라 하는 거죠.

 

신라는 특히 유교의 ‘충’을 중요히 여겨서 화랑도의 규칙에 ‘세속오계‘가 있기도 했습니다.

 

삼국이 모두 굉장히 유학을 장려하고 발달시킨 모습들을 보이는데 이유가 있겠죠?

 

삼국시대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야 했으니까요. 자연스레 유학이 발달한 거죠.

 

 

 

다음은 통일신라로 가보겠습니다.

 

통일신라의 교육기관은 뭐죠? 신문왕이 설립한 국학입니다. 신라는 삼국시대 법흥왕 때 이미 불교를 공인하긴 했지만, 여전히 유학도 장려합니다.

 

교육 기관인 국학 또한 유학을 계속 가르치며 통일 직후 고구려, 백제인들의 자발적 복속을 유도시켰죠.

 

통일신라도 유학의 발달을 보여주는 근거가 남아있겠죠? 제가 한번 얘기했을 텐데, 6두품 출신의 설총, 원효의 아들이죠.

 

국학을 세우며 유학을 장려했던 왕도 신문왕이고, 설총을 등용했던 왕도 신문왕이라 연관 지으면 외우기 쉽습니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바치는데, 말 그대로 꽃의 왕이 지켜야 될 규범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통일신라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실시합니다.

 

제가 왕 이름은 정직하다 했었죠.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실시하면서 원성을 많이 듣게 됩니다.

 

독서삼품과는 크게 보면 과거 시험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 과거 시험은 목적이 뭡니까? 바로 왕권 강화죠.

 

A : 엥, 관리를 등용하는 게 왜 왕권 강화예요?

 

과거제는 주체가 왕입니다. 즉 왕이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독서삼품과를 실시한 시기가 통일신라 말기입니다. 통일신라 말기는 되게 혼란스러웠죠.

 

녹읍이 부활하고 귀족들의 힘이 커지면서 중앙에서 왕위 다툼을 하던 통일신라 말기에 왕권 강화책을 내놓으면 원성을 당연히 듣겠죠?

 

그래서 독서삼품과는 얼마 안 가 폐지됩니다. 이후 고려시대에 과거제로 이름을 바꿔 재등장하죠.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을 퍼즐처럼 맞춰가면 외울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 이런 개판인 신라를 보면서 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린 사람이 있죠?

 

최치원, 진성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렸으나 6두품의 출신이라 튕겨나간 비운의 인물입니다.

 

끝으로 통일신라에는 국학이 있다면 발해에는 주자감이 있었다는 정도,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충분한데 100점을 맞고 싶다 하신 분은 되게 가끔 출제되는 통일신라 유교의 키워드.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최치원의 계원필경 정도 눈에 익히시면 되겠습니다.

 

유교만 해도 양이 많죠? 근데 고대의 학문엔 도교도 있고 불교도 있습니다.

 

고대 유학의 역사와 친해지셨다면, 나머지도 쉽게 쉽게 머리에 들어올 겁니다.

 

삼국에서 고구려 하고 나면 백제가 쉽고, 고구려 백제하고 나면 신라가 쉬운 거처럼요.

 

 

2. 역사서

 

그런데 여러분, 혹시 삼국사기 와 같은 국사서는 어떤 시기에 작성하는 걸까요? 그냥 단순히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했다는 사실 말고, 그 시기의 상황말입니다.

 

블로그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를 해냈어! 싶은 좋은 사실들을 적지 않습니까? 기분이 좋을 때 쓰는 거죠. 창피한 사실은 조금 피해서 쓰는 경향도 있고요.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국서는 전쟁에 패하고 궁지에 몰릴 때가 아니라 나라가 잘 나가는 시기에 쓰였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가 흥하는 시기와 망하는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면, 서의 편찬 시기도 어림잡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신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양왕 때 이문진에 의해서 쓰인 책인데요. 영양왕 때가 언제냐면 바로 수나라가 침략한 시기입니다.

 

근데 서기는 대게 잘 나갈 때 작성 한다고 했지 않나요?

 

맞습니다.

 

영양왕 때 수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그 수 군대를 모조리 물리치는 데에 성공합니다.

 

대표적으로 살수대첩이 있겠죠. 그래서 고구려는 싱글벙글 일기장을 펼칩니다.

 

 

612년 날씨 맑음. 오늘은 수를 잡았다. 정말 재밌었다.

 

 

그 강력한 통일 제국 수의 공격을 받아 쳐내다니, 당연히 기록을 남겨 자랑하고 싶겠죠. 그러면서 <신집>이라는 역사서가 나오게 된 겁니다.

 

자 그럼 문제, 백제에는 <서기>가 있습니다. 언제 쓰였을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백제가 가장 흥했을 때가 언제죠? 전성기의 근초고왕입니다.

 

고흥에 의해 쓰였습니다.

 

신라 볼까요? 신라도 똑같아요. 신라에는 <국사>가 있습니다. 느낌 오나요?

 

그렇죠. 신라의 전성기 진흥왕 때 거칠부에 의해 쓰였습니다. 무턱대고 외울 때보다 쉽죠?

 

역시 잘 나가는 모습 자랑하고 싶은 건 다 똑같습니다.

 

고대의 역사서는 이게 끝입니다. 딱 3개밖에 없네요. 아주 좋아요.

 

 

 

3. 도교

 

이제 도교 들어가 보죠. 도교도 거의 역사서 급으로 볼 게 없습니다.

 

도교란 신선 사상과 무위자연과 관련됩니다. 유교, 불교급으로 국가가 막 밀어주는 종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믿는 사람이 있더라는 거죠.

 

그리하여 고구려에서 발견된 벽화 ’사신도‘ 그냥 동서남북에 신이 있어서 사신도입니다.

 

(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한국인이 좋아하는 거 다 때려 넣었습니다 )

 

 

백제에는 도교에 영향을 받은 문화재로 산수 무늬 벽돌, 금동대향로가 있겠네요

 

산에서 신선들이 사는 모습을 벽돌에 그려서 산수 무늬 벽돌입니다.

 

 

...

 

 

알고 보니 문화재 이름들 정말 대충 지었죠?

 

근데 금동대향로는 정말 특별합니다.

 

딱 봐도 퀄리티가 좀 다르죠?

 

이 금동대향로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백제에 대한 기록들만 남아있었지, 실제로 백제가 매우 발전한 나라임을 입증해 주는 실제 사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발굴되면서 한방에 정리됩니다. 백제가 정말 잘 나갔구나~ 하고요.

 

금동대향로는 왜 도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까요?

 

잘 보시면, 용이 받치고 있는 향로의 위에서 신선들이 머리도 감고 낚시도 하고 있고 정말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교에서 중요히 여기는 무위자연과 일치하죠.

 

 

이제 신라를 알아볼 건데, 사실 신라와 도교의 관계는 조금 애매합니다. 유력한 후보가 화랑도인데,

 

도교를 추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대신 도교가 추구하는 사상과 일치하는 생활 모습을 많이 보였죠.

 

화랑들이 명산유곡, 그러니까 좋은 산과 좋은 강을 찾아다녔거든요. 그들의 모습이 신선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도교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벌써 고대의 유교와, 역사, 도교를 끝마쳤습니다. 어느새 불교만 남았네요.

 

근데 제가 불교를 마지막에 하는 건 이유가 있겠죠?

 

 

 

 

4. 불교

 

 

불교를 빼놓고서는 우리의 역사나 문화를 설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옛사람들에게 불교는 정말 절대적 존재, 절대적 종교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요.

 

일단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 볼까요?

 

불교는 왕실에서부터 주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요.

 

불교에선 부처가 신적인 존재로 받들여지는데, 왕들은 자신을 부처라 칭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업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현재 모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려 했습니다.

 

부처까진 쉽게 이해가 가는데, 업부터는 살짝 아리송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그런 거죠.

 

’너가 왜 그따위로 사는지 알아? 너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내가 왜 귀족인 줄 알아? 나는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거든 ‘

 

즉, 이렇게 현재의 모습을 고착화시키고 기득권을 안정시키는 기능으로 불교가 쓰인 겁니다.

 

피지배층들로 하여금 자신이 못 사는 것은 사회의 모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도록, 나아가 피지배층의 삶에 순응하며 살도록 유도하는 셈이죠.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너무 부정적으로 볼 순 없는 게, 힘든 사람들이 불교에 기대어 마음의 위안을 얻고, 하루를 버텨내도록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고대에서 불교는 호국불교. 즉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쓰였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온 초기에는 왕실과 귀족에 국한된 종교였습니다. 백성들은 불교가 뭔지도 몰랐죠.

 

실제로 삼국을 보면 율령, 불교, 태학 누굽니까? 소수림왕이죠 (중국 전진)

 

그리고 백제는 침류왕 (중국 동진), 모두 왕이 주도했죠. 백성들이 믿기 시작해서 그 시대에 쓰인 기록이 아니라, 왕이 나서서 ’공인‘했기 때문에 업적이라 칭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교리를 읽어야 했는데요, 다시 말해  글을 읽을 수 있는 상류층의 문화였죠.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건 아닙니다. 왕이 하란다고 모두 바로 태도가 변할 리가 없습니다.

 

불교는 엄연히 삼국의 입장에서 외래 종교였기 때문에, 크고 작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반발이 가장 심한 건 신라였죠.

 

다들 아시듯 이차돈의 목을 쳤더니, 귀족들은 믿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뭐 이차돈의 목을 자르자 흰 피가 뿜어져 나오고, 꽃이 내리는 부처님의 기적을 보게 되자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 사실 누가 눈앞에서 사람 목이 날아가는데 안 믿을까요?

 

어쨌든 신라도 삼국 중 마지막 타자로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는 모습. 따라쟁이 법흥왕은 소수림왕처럼 불교도 공인하고, 율령도 반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불교를 들여온 직후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니까 피지배층은 불교가 뭔지도 몰랐죠. 평범한 백성들은 먹고살기가 바빠서 글을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알려면 교리를 글로 읽어야 한다’가 당시의 불교였거든요 (교종)

 

그러던 중 통일신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백성들에게도 불교를 널리 알리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

또 나타나네요.

 

바로 원효입니다. 그리고 원효라 하면 그의 베프 의상도 빠질 순 없죠.

 

이 둘은 정말 친해서,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 함께 중국의 유학길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유학길 중간에 원효에게 일이 일어나죠.

 

‘너무 힘들어, 못 가겠어. 지쳤어. 물이 먹고 싶어’ 그렇게 눈이 뒤집힌 채 밤 중에 물을 찾던 원효는 넘치는 차가운 생수를 발견합니다. 바로 원샷. 한숨 푹 자고 보니 해골 물에 담긴 썩은 물이었던 거죠. 그때 원효는 깨닫습니다.

 

‘똑같은 물을 갖고도 어제는 맛있게 마시고 지금은 마시지 못하니 모든 진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구나..‘

 

그러곤 자신은 이미 다 깨달았다며 의상을 두고 유학길에서 하차합니다. 그렇게 돌아온 원효는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고 백성들에게도 불교를 전파하려 합니다.

 

그런데 원효는 원래 지배층이었어요. 하지만 불교 전파를 위해 근엄한 지배층의 모습을 모두 갖다 버리고 백성들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원효가 지은 노래가 ‘무애가’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결정된다를 주장하며, 백성들에게 극락세계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아미타, 아미타를 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아까 말했듯, 이 시기는 삼국이 통일되고 통일신라로 접어드는 과도기여서 백성들은 삼국 전쟁의 고난을 겪고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런 와중에 죽어서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원효가 나타나니 완전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아미타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죠. 다른 말로 ‘정토종’입니다.

 

이렇듯 원효라 하면 술을 마시고, 춤추며 친근하게 불교를 전파하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사실 원효는 학문적으로 매우 깊이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가 연구한 사상엔 ‘화쟁사상’ ‘원융회통사상’등이 있죠

 

뿐만 아니라 저서로써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등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럼 그의 베프였던 의상은 원효가 이렇게 발로 뛰어다닐 때 뭘 했을까요?

 

의상은 원효와 스타일이 조금 달랐습니다. 유학길 중간에 돌아간 원효와 달리 의상은 유학을 다녀옵니다.

 

그리고 다녀와서 관음 신앙을 발달시키죠.

 

불교 하면 생각나는 건 다 원효, 의상이 한 거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의상 또한 원효처럼 학문적인 발달을 많이 이뤄냈습니다. 이름도 비슷하네요 ‘화엄종

 

그는 <화엄일승법계도>라는 그림과 부석사라는 절의 창건과 관련이 있는데 이건 고려시대에 가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추가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정도만 기억하시고 넘어가죠.

 

 

 

제가 불교는 본디 글을 아는 자의 특권이어서, 왕실과 귀족만의 종교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교종이라 하고요. 그런데 원효가 주장하는 ‘아미타를 부르면 극락에 간다’를 보면, 아미타를 말하는 건 글을 몰라도 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원효와 의상이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고 나자 신라 말기에 선종이 유행합니다.

 

행함으로써 즉 참선을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 이게 선종인데 이걸 호족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골품이라는 폐쇄적인 신분제 사회가 그들이 왕이 되는 걸 막고 있었는데, 그걸 깰 수 있는 논리를 선종이 제공해 줬으니까요.

 

그 결과 돈이 많은 호족들은 선종을 팍팍 밀어주기 위해서 9산선문을 세웁니다. 호족의 후원 아래서 9개의 산에 사찰을 세운 거죠.

 

이때 선종과 함께 유행했던 풍수지리가 어렴풋이 기억나실 겁니다.

 

 

 

5. 불교의 탑, 불교의 석상

 

 

마지막으로 불상과 불탑에 대해서만 알아보고 고대의 종교 파트는 마무리짓겠습니다. 이름까지 외울 필요는 없고 이게 어느 시대인지만 알 정도면 충분합니다.

 

 

삼국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불상이 있는데, 금동으로 만든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이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구분이 없어서 삼국시대의 지표로써 출제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대표적인 불상은 ‘금동 연가 7년 명 여래 입상‘. 이름 어렵죠?

 

외우지 마세요. 생긴 것만 기억하고, 이게 고구려임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백제는 서산 용현리에 마애여래 삼존상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불상을 만든 게 아니라 바위에 새긴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불상은 불상 중에서도 가장 활짝 웃고 있어서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석상입니다.

 

신라에는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 있는데, 눈치채시겠지만 삼존은 3명을 뜻하는 겁니다.

 

 

그럼 이제 구분이 더욱 쉽겠죠, 3명이 있네? 그럼 고구려는 아니고~ 이런 식으로 요.

 

또 예리하신 분은 느끼셨을 텐데, 삼국시대의 불상들은 대부분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불교가 삼국시대에 처음 들어왔잖아요. 아마 그런 외래 종교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겠죠.

 

 

A : 다른 불상들도 다 웃고 있으면 구분이 안되지 않나요?

 

다행스럽게도 통일신라로 넘어가면서 불상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통일신라 대표적인 불상, 석굴암을 보시죠.

 

 

석굴암을 보고 있으면 온화함과 친숙함보다는 압도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발해의 불상은 이름이 특이해서, 안 외우려 해도 외워질 것 같네요. ‘이불 병 좌상’ 입니다.

 

이불을 덮고 있는 부처님이 아니라, 2명의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이제 불탑 볼게요.

 

고구려 같은 경우는 대부분이 목탑이어서 모두 불타 남아있는 게 없구요.

 

백제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입니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석탑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한국에선 여태 모든 불탑을 보수 및 복원 목적으로 한 번씩은 해체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체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그래서 타임캡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500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안에 담겨있죠. 분명히 탑 안에는 기록도 있고, 뭔가 그 시기를 보여주는 사료가 있을 텐데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죠.

 

원래 저는 불탑이나 불상 등 이름을 외우는걸 최대한 유도하지 않도록 부수적인 설명을 줄이는 편인데요, 이렇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것만 tmi좀 하겠습니다.

 

 

이제 신라의 탑!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가시면 ‘분황사 석탑’이 있는데, 넓적~하니 구분하기 참 좋습니다.

 

분황사 석탑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

사진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 건 디지털 복원 가상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불탑들이 목탑이라 모조리 불타 없어져 남은 게 없는 것처럼, 9층 목탑도 경주에 그 터전만 남아있죠.

 

 

그런데 학자들은 이 황룡사 9층 목탑이 삼국통일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겨우 목탑 주제 삼국통일에 무슨 기여를 했을까요?

 

이 황룡사 9층 목탑은 643년에 세워졌습니다. 642년엔 무슨 일이 있었죠?

 

신라가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패하고 침울해진 시기죠. 이때 선덕여왕이 국가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무려 아파트 30층 높이의 탑을 세웁니다. 그리곤 층마다 신라가 제압해야 될 나라의 이름으로 의미 부여합니다. 즉 삼국통일의 비전이라고도 볼 수 있죠.

 

신라인들은 눈을 뜰 때마다 눈앞에 삼국통일의 비전이자 웅장한 탑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매일매일을 그렇게 시작했기에 삼국을 통일했을지도 모르죠. 왠지 수능생들이 벽에 ‘합격’을 붙이고 매일 스스로 최면하는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이런 건축물이 남아있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의해 불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통일신라엔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이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 3층 석탑

 

이 석탑도 역시 수리와 복원을 위해 해체했었는데요. 제가 아까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안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죠?

 

경주 불국사 3층 석탑 안에는 실제로 보물이 있었습니다. 수리하기 위해 열어봤더니 세상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고등학교 때 한 번쯤은 외우셨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가챠 성공했네요. 찐 보물이 나와버립니다. 정림사지 석탑엔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리고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은 다른 탑과 세트입니다. 바로 앞에 다보탑이란 게 있거든요. 두 탑 모두 불국사 안에 있습니다. 둘이 엮어서 기억해 두시면 편하겠죠?

 

다보탑

 

끝이 아닙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감은사지 3층 석탑

 

이 탑은 통일신라의 자부심, 통일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탑입니다.  고작 3층이지만 굉장히 높습니다.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자, 신문왕이 그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석탑 아래에 용이 머물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해 놓았죠.

 

참, 갈수록 탑이 많아져서 구분이 힘들어 보이는데요, 걱정 마세요. 시험에서 탑 사진만 덜렁 주고 이름을 맞추라는 악마 같은 문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기 정도는 유추해내셔야 합니다.

 

 

이제 통일신라 말기입니다. ‘진전사기 3층 석탑’

 

진전사기 3층 석탑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승탑도 유행하게 됩니다.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이름은 쌍봉인데 그냥 탑이군요.

 

 

마지막으로 발해에 유명한 탑은 ‘영광탑’이 있겠습니다.

 

영광탑

 

이렇게 해서 종교와 관련한 고대의 문화 살펴보았습니다.

 

'종교와 관련한' 이라 함은.. 맞습니다. 고대의 문화 마지막 3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경제, 사회, 그리고 이번 종교에 이어 마지막 부를 보시기 전에 머리 좀 식히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문화재는 이름만 보아선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키워드 정리에 같이 넣어드리겠습니다.

 

  유교 역사서 도교 불교
고구려
태학 (소수림왕, 중앙)
경당 (장수왕, 지방)

신집 (영양왕 이문진) 사신도 소수림왕 (전진)
백제
왕인의 논어 천자문 일본 전파

서기 (근초고왕 고흥) 산수무늬 벽돌
금동대향로
침류왕 (동진)
신라
임신서기석
화랑도 세속오계

국사 (진흥왕 거칠부) 화랑도 법흥왕 (이차돈)
통일신라
국학 (신문왕)
설총의 화왕계
독서삼품과 (원성왕)
최치원 시무 10여조

   
원효-무애가, 화쟁사상,원융회통,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

의상-관음, 화엄종, 화엄일승법계도, 부석사

혜초-왕오천축국전

선종 유행 - 9산 선문

발해
주자감

     

 

 

  불상 불탑
고구려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금동 연가 7년 명 여래 입상  
백제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 경주 석조 여래 삼존 입상
경주 분황사 석탑
황룡사 9층 목탑 (선덕여왕)
통일신라 석굴암
경주 불국사 3층 석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다보탑
감은사지 3층 석탑 (신문왕)

발해 이불병좌상 영광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