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능검 응시자분들만이 아닌,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흥미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통일 신라 분량의 반도 안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빠르게 끝내보죠
1. 발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 얌전히 신라에 흡수되지 않고 고구려의 피를 이어가길 원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위로 올라가 세운게 바로 발해죠.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합니다. 즉 고구려 멸망 30년 뒤입니다.
세운 사람의 이름이 대조영이니까 발해는 대 씨가 왕족인 건 유추할 수 있겠죠? (통일 신라는 김 씨)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발해의 초기 지배층들은 신라와 당을 싫어했습니다. 고구려는 나당연합에 의해 무너졌으니까요.
반당 사상이 보이는 대표적인 왕이 무왕인데요. 무왕은 인안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름만 봐도 ‘무’ 왕입니다. 느낌 오시죠? 당나라와 자주 싸웁니다.
먼저 무왕은 자신의 아우인 대문예를 시켜서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합니다. 고작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친해지려고 했다는 이유에서요.
또 무왕은 장문휴를 보내서 중국의 산둥반도를 공격합니다. 당을 정말로 싫어하나 봅니다.
하지만 싸우기만 해서는 발해가 200년이나 갈 수 없었겠죠?
무왕 다음이 문왕인데, 무왕도 그렇고 문왕도 그렇고 이름이 아주 정직합니다. 무왕이 싸울 무였다면 문왕은 글월 문. 또 느낌이 오시죠? 되게 점잖은 왕이었습니다.
이때는 당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무왕이 반당이라면 문왕은 친당이였죠. 친한 친구끼리는 닮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문왕은 당나라의 여러 가지 제도들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발해의 3성 6부 조직도 이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것이죠.
문왕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와도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기찻길처럼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신라도도 닦아둡니다. 꽤 붙임성이 있는 문왕이네요.
모처럼 당나라, 신라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시기인 만큼 내부적으로도 정비하기로 마음먹은 문왕. 도읍을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합니다.
삼국시대에 저희는 배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개혁이 성공하면 전성기가 온다는 것을요.
발해도 마찬가지로 문왕이 여러 개혁을 성공하며 길을 닦아놓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전성기의 왕은 바로 선왕.
선왕은 영토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힙니다. 신라도 삼국을 통일하여 영토가 넓어지자 행정구역을 나눈 것처럼, 발해도 성왕 시기에 영토가 너무 넓어지자 5경 15부 62주로 행정 구역을 정비합니다.
이때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요동을 거의 다 수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답습니다.
당시 발해가 너무 잘 나가서 붙은 별명이 해동성국입니다
그러다 926년, 거란족에 의해 발해는 와르르 무너집니다.
어라? 갑자기요?
발해의 전성기와 멸망 사이의 공백이 너무나 짧습니다.
물론 거란족이 세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릅니다. 기록상으로 열흘이 채 되지 않거든요. 조금 이상하죠?
그래서인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발해의 멸망 원인 중에서 백두산 분화설이 가장 유력했습니다. 지금은 백두산 폭발의 시기가 정확히 파악되어 폐기되었지만요.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선 조금 뒤에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발해를 공부하면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겁니다.
중국도 그렇고 러시아도 그렇고 발해를 자기 역사라고 우기지 않습니까? 영토가 겹쳐있기 때문인데요, 그럼 우리는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을 증명해야죠.
다행히도 아주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발해의 문왕이 일본 국왕에게 보낸 국서인데요.
거기 쓰인 글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나는 고려의 왕이다‘라고 씁니다. 옛날에는 고구려를 고려, 구려 이렇게 불렀거든요. 그때도 줄인 말이 유행했나 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근거들이 있는데, 우선 지배층의 대다수가 고구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생활 모습도 발해 깊숙하게 뿌리내려있었죠. (대표적으로 온돌의 사용)
그리고 2명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 돌사자상, 석등 모두 고구려의 문화와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문왕이 3성 6부제를 당나라에서 들여온 것처럼 당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다.
3성 6부 외에도 감찰기구로 중정대를 둔 것도, 교육기관으로 주자감을 둔 것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아예 똑같이 가져온 게 아닌, 체계만 가져오고 이름에선 나름대로 독자성을 띈다는 점.
당의 영향을 받은 모습은 상경 용천부의 주작대로에서도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와 함께 존재했던 발해까지 남북극 시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발해는 저희의 핏줄이기도 하니, 이런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단 10일 만에 발해제국이 멸망했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아래 글을 준비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역사란 승자의 서술이니, 거란 측의 과장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거든요. ( 발해의 멸망을 서술한 책이 ’요서‘인데 거란에서 쓴 겁니다. )
즉, 여기서부턴 학습의 취지와는 관련성이 떨어지지만, 타오르는 애국심을 가지셔서 ’나는 발해의 빛보다 빠른 멸망에 납득할 수 없어!‘ 하시는 분들을 위한 소재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만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2. 발해의 멸망 원인
자세한 발해의 멸망 과정을 보자면, 거란족은 발해의 전력이 몰려 있던 요동 전선을 선회하여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합니다.
그곳을 무너뜨린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여 모이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방식으로 수도를 무너뜨린 거죠.
수도에서 발해의 국왕 대인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수뇌부가 와해된 발해는 별다른 수를 써보지 못하고 멸망에 이릅니다.
이처럼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유목민족들이 사용한 주된 전쟁방식은 국경에서 곧바로 수도까지 쳐들어가는 속전속결의 형태였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조금만 늦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백제 멸망 때의 나당연합군은 수도인 사비성으로 곧바로 진격하여 그곳을 포위, 끝내 항복을 받아냈었죠.
발해 멸망의 주체였던 거란에게 고려 또한 실제로 2차 침입 때 수도 개경이 함락당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한 번 만에 완전히 쓸린 발해와는 달리 고려는 이미 이를 겪은 발해인들이 있었기에 청야 전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비책을 써서 거란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역으로 퇴각하려는 거란군을 추격해 귀주대첩으로 궤멸시키기까지 했죠.
발해인이 왜 고려에 있는지는 당시의 후삼국 정사를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고려는 후고구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세운 것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발해의 멸망은 후고구려가 후백제와의 고창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과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공산 고창 일리천. 복습!)
왕건은 고창 전투 이전에 이미 견훤에게 공산 전투에서 패배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음 고창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저번 글을 서술할 땐 이 사이의 설명을 정말 간략히 하여 뭔가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한 느낌을 받으셨을 텐데, 이젠 이해가 되실 겁니다.
최대한 후삼국에 집중하려고 발해에 대한 요소는 미뤄뒀거든요.
발해가 망하자 후고구려로 수만 명의 유목민이 내려옵니다. 바로 맞닿아있으니까요.
전투에 패해서 죽기 직전까지 밀린 왕건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발해 스스로도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한 만큼, 이미 왕건은 발해를 본래 '우리의 친척 나라' 라고 표현할 정도로 친근하게 여기기도 했죠.
왕건은 이를 놓치지 않고 모두 수용하여 군사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망한 나라의 잔존세력을 받아준 것뿐인데, 어떻게 군사력이 회복되냐고요?
아까 보신 것처럼, 발해는 속전속결의 침입에 멸망합니다. 즉 발해는 수뇌부가 함락되어 멸망한 것이지, 실제적인 전투는 몇 번 없었기에 전투력은 남아있었거든요.
알고 보면 후백제는 1대 2로 싸운 겁니다. 고창 전투에서 질 수밖에 없었죠.
고창 전투가 끝난 뒤에도 발해의 유민은 계속해서 유입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발해의 왕, 대광현도 있어서 왕건이 그에겐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이라는 특권을 하사하기도 했죠.
어쩌다 이 얘기까지 왔죠?
아무튼 그만큼 나라가 순식간에 망하는 건, 동아시아에서 흔하다는 얘기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그대로 밀고 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 낸 것도 순식간이었죠.
그땐 심지어 8일 만에 수도는 이미 함락당하여, 오히려 발해 멸망 당시 상경용천부가 함락당한 속도보다 빠릅니다.
전쟁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조금 더 버틴 것뿐이죠.
6.25 전쟁도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에 서울은 단 3일 만에 함락당했었죠.
즉, 시대를 막론하고 압도적인 기동성을 통한 속도전 및 수도 공략 전술은 꾸준히 애용되어 왔고 특히 군사력 자체가 기병 편제 위주였던 유목 민족들은 이를 더 쉽게 쓸 수 있던 것뿐입니다. 피해자가 발해란 점이 가슴 아프긴 하지만요.
왜 발해가 순식간에 멸망한 지 이해가 되실까요?
자 이제 고려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고대 국가의 유물에 대해 알아볼 계획입니다.
제가 쓴 글은 한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체득하는 게 주목적이라, 불필요한 여러 유물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어갈 겸, 한 번 싸악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질 건데요. 심화 과정에 도움이 되지만 아직 한국사가 처음인
분들은 2회독차에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약간의 스토리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암기가 베이스라 쉽게 흥미가 떨어지실까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한능검 심화가 목적이신 분들은 꼭 봐야겠죠?
| 발해 | |
| 7세기 | 698 대조영 건국 |
| 8세기 | *무왕 -당과 대립 : 흑수 말갈과 산둥 지방 공격 -돌궐, 일본과 연합하여 당,신라 견제 -독자적인 인안 연호 사용 *문왕 -당과 친선 : 문물 수용, 3성 6부, 주자감, 중정대 설치 -독자적인 대흥 연호 사용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 -신라도 개설 |
| 9세기 | *선왕 -영토 확장 : 말갈족 대부분 복속, 요동 지역까지 진출 -지방제도 정비 : 5경 15부 62주 -해동성국 -독자적인 건흥 연호 사용 |
| 10세기 | 926 거란족에 의해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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